천천히 가는 한국의 뒷간 시곗바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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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본사 9층에는 ‘성 중립’ 화장실이 있다. 남녀가 동시에 같은 화장실에 들어가 각각 옆칸에서 볼일을 보고 함께 손을 씻는 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모두의 화장실’이다. 보통 성 중립 화장실은 성소수자가 차별 없이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끔 만든다지만 9층 화장실은 그런 숭고한 목적과는 거리가 있어보인다. 세면대 바로 옆에 남성용 소변기를 설치한 도발적 구조 탓에 조금만 시선을 옮겨도 쉽게 타인의 신체 정보를 스캔할 수 있는 ‘모두가 불편한’ 화장실이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도 낯설다. 9층에서 일하는 여직원들은 혹여 아는 남자를 화장실에서 마주칠까봐 매번 아래층 여성전용 화장실을 찾는다.

장애 유무나 성별 등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모두의 화장실이 국내 대학 중 성공회대에 처음으로 설치된 지난 3월 16일 학생들이 화장실을 살펴보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장애 유무나 성별 등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모두의 화장실이 국내 대학 중 성공회대에 처음으로 설치된 지난 3월 16일 학생들이 화장실을 살펴보고 있다. / 김창길 기자

공중화장실이 지금의 성별 분리 형태가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학계에선 여성의 일할 권리가 본격 부상한 빅토리아 시대(1837~1901)를 탄생 시점으로 본다. 그 전까지 외부 화장실은 오직 남성만 이용할 수 있었다. 점차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늘며 여성 화장실이 생겨난 뒤 분리 형태가 자리 잡았을 수 있다. 미국에선 매사추세츠주가 1887년 직장 내 여성 화장실 설치를 의무화하는 법을 통과시키면서 공공장소의 성 분리 화장실이 제도화됐다.

화장실이 성 중립으로 바뀌면 크게 3가지를 얻을 수 있다. 당연히 성소수자들의 화장실 이용이 편해진다. 보호자가 자신의 신체 성별과 다를 때 곤란했던 지체장애인의 화장실 이용도 수월해질 수 있다. 여성들은 긴 화장실 대기줄에서 더 이상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아도 된다. 반대 주장은 크게 2가지다. 가뜩이나 문제가 많은 공중화장실 성범죄가 더 늘 거란 우려(2015~2019년 공중화장실에서 발생한 성범죄는 4791건이고, 이중 절반 이상이 불법카메라 범죄다)다. 대소변 장면을 남녀가 서로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심리적 저항도 무시하기 어렵다.

미국 등에서도 찬반이 팽팽하게 갈렸지만 2000년대 성 중립 화장실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이후 현재는 제도가 안착했다. 성 중립 화장실의 성범죄가 더 많다는 건 통계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다른 성별과 함께 화장실을 쓰는 문화도 나이가 어릴수록 더 쉽게 받아들인다. 지난 3월 LA타임스에 따르면 2018년 성 중립 화장실을 도입한 미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시 고등학교들은 최근 학생들의 지지에 힘입어 ‘성 중립 라커룸(샤워시설+탈의실)’을 추진 중이다. 2014년 기준 미국 전역에서 150개 대학이 성 중립 화장실을 만들었고, 캐나다 밴쿠버시는 공원 내 ‘성 중립’ 화장실 설치를 의무화했다. “인간의 역사는 곧 화장실의 역사”라던 빅토르 위고의 말을 빌리자면 세계 각 지역의 ‘뒷간’ 시곗바늘은 역사의 수레바퀴만큼이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최근 고속도로 남자 화장실에 여성들이 몰려 들어가는 사진 한장이 온라인상에서 논란이 됐다. 벚꽃철 이용객이 붐비면서 대기줄을 참지 못한 여성들이 부득이 남성 화장실을 이용한 것인데 이를 비판하는 댓글이 게시글에 줄줄이 붙었다. 어떤 언론은 이 논란을 보도하면서 여성들의 처벌 가능성을 법리적으로 살폈다. 한국의 뒷간이 빠른 시일 내 바뀌긴 어려울 것 같다.

<윤지원 경제부 기자 yj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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