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이 아픈 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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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호르몬 주사는 끊었다. 자의라고 할 수는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약했던 간 상태가 악화됐다. 평생 맞아온 호르몬 주사가 부담됐을 수도 있다는 진단에 선택은 없었다. 다행히 의료진은 트랜스젠더에 관한 기본 인식을 갖춘 사람이었다. “호르몬 주사는 생존을 위해 또 다른 중요한 문제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냐”는 위안의 말을 잊지 않았다.

2019년 제주에 사는 엄마를 보러 갔다가 바닷가를 거닐고 있다. / 김비 제공

2019년 제주에 사는 엄마를 보러 갔다가 바닷가를 거닐고 있다. / 김비 제공

그나마 진료 첫날부터 성확정 수술을 받은 트랜스젠더라고 밝혔으니 가능한 진단이었다. 온전히 새로운 삶을 살기를 바라는 성소수자라면, 망설이고 어긋나 정확한 진단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을 일이었다.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불식된 사회라면 불이익을 염려할 필요가 없겠지만, 이처럼 누군가에겐 병원에 가는 일조차 부담이고 불안이다. 차별 경험을 알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누구의 불안이든 줄일 수 있다면 그러려고 노력하는 게 공동체의 책무 아니냐고 묻고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지금부터 약을 잘 먹고 금주·금연하는 게 최선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될 수 있는 한 스트레스 없이 지내야 한다고 못 박기도 했다. 도처에 혐오와 폭력적인 말들이 떠돌고 있는 현재이니 쉽지 않을 일이었다. 게다가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니 집중과 고민이 더해질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성소수자 친화적인 사회’임을 명명백백히 증명해 성소수자들의 스트레스를 줄여줄 수도 없는 우리 사회에서 그나마 생존을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건 ‘호르몬 치료’뿐이었다.

호르몬 주사를 그만 맞기로 한 날, 신랑에게 “내가 남자같이 변하더라도 날 버리면 안 된다”고 부탁했다. 다행히 그는 농담 섞인 내 말의 진심을 곡해하진 않는 사람이었다. 너무 가볍거나 무겁지도 않게, “당연하다”고 대답해주었다. 물론 호르몬 치료를 중단한다고 당장 겉모습이 남자로 변하는 건 아니었다. 이는 호르몬 치료만으로 누구든 외모나 성별이 반대 성별로 ‘변신’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다행히 나는 키만 조금 클 뿐 목소리도, 외모도 중성적이었던 터라 호르몬의 영향이 크진 않았다.

몸의 상처보다 시선과 태도에 아파 약한 몸에 살얼음판 같은 삶을 그래도 살아 나아가야 했으니, 애초부터 나의 몸 상태를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호르몬 주사를 맞는 주기도 최대한 늘려 잡았고, 음주와 흡연과 관련해선 철저하게 선을 지켰다. 건강을 지키는 일이 결국 몸이 허약한 누구에게든 줄타기 같은 거라면 나름 치밀하게 균형 잡힌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결국 올 게 온 셈이었다.

그렇게 호르몬 치료를 중단하고 3년 정도 흘렀다. 다행히 갱년기를 겪는 비트랜스젠더 여성들과 아마도 유사한 증상을 겪는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갑자기 과도하게 열이 오르거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뛴 적도 물론 있었다. 이유 없이 감정이 치솟기도 했다. 남자 태생을 가져서 그런 건지 턱 밑에 자잘하게 수염이 자라기도 했는데, 이 정도 나이를 먹고 보니 그 정도는 별일 아니었다. 스물이나 서른이라면 사소한 징후마저 크게 느껴져 끔찍한 좌절감에 꽤나 흔들렸겠지만, 다행히 부딪히고 버텨낸 시간의 힘은 마음속에 단단한 근육을 키워주었다. 줄타기를 할 필요조차 없는 삶이 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똑같은 불안이고 위태로움이지만, 내려놓은 게 많아 몸이 가벼워졌을 뿐이다.

다행스러움은 개인적인 행운일 뿐, 성소수자들을 위한 보편적 의료시스템의 필요성은 여전하다. 병원에 다니며 제일 아팠던 건 곪아 째진 상처나 부러진 곳이 아니라 시선이고 태도였다. 의료기관은 한사람의 구성체가 아니고, 다종의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평소 삶의 습속에 따라 각자의 인식을 형성하고 있었다. 사람의 건강과 생명을 다루는 일이고 인간의 기본권과 관련된 분야인 만큼 종사자들 간 태도의 격차가 크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 사회가 성소수자를 지우고 그 삶을 부차적인 것으로 내몰면서 성소수자의 존재는 희귀한 것이 되고 이내 구경거리가 되고 만다. 일생 타인의 시선을 받고 조롱을 견디며 살았던 누군가가 의료기관에서마저 그런 취급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은 극단적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예민한 누군가의 ‘과잉 반응’으로 단정하려는 몰이해는 또 다른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똑같은 한사람의 존재와 삶을 부정하고 조롱하는 폭력적 언어들이 도처에 현수막처럼 깔리는 게 우리의 현재다. 그런 언어들에 동조하고, 별 거부감 없이 웃고 넘기는 게 이 사회의 현재다. 당신의 몸, 당신의 삶, 당신의 사랑을 두고 서로 킥킥대는 사회 속에 살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될 때, 어디에 가든 그런 취급을 당하리란 불안 속에 놓여 있을 때, 눈치를 보고 시선을 신경 쓰는 당신의 현재는 ‘과잉’인가? 믿음을 보여주지 못한 공동체 속에서 불신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삶이 보이는 당연한 ‘반응’인가?

침대에서 남편과 장난을 치면서 보내는 어느 휴일 아침. 그림을 그리는 남편 박조건형씨의 작품 /김비 제공

침대에서 남편과 장난을 치면서 보내는 어느 휴일 아침. 그림을 그리는 남편 박조건형씨의 작품 /김비 제공

그저 ‘늙는 몸’이라고 치부하고 싶은데 의료기관에 내원할 때마다 그런 불안과 자괴감에 시달리는 게 싫어 한가지 전략을 마련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웃으며 반갑게 인사할 것. ‘수술’을 받은 몸이라는 걸 알릴 땐 ‘맹장 수술’을 받은 듯이 아무렇지 않게 말할 것.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던 1990년대만 해도 ‘트랜스젠더’라는 용어조차 사람들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던 시절이어서, 내가 그렇다고 하면 단박에 이해하는 의료진이 많지는 않았다. ‘성확정 수술’이나 ‘성별 적합 수술’이라는 용어는 고사하고 ‘성전환 수술’이라고 해야 그제야 “아 그러냐”고 말하며 장시간의 침묵 속에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의료진을 마주하기도 했다. 의사는 의사 나름대로 진단이나 진료를 다시 처음부터 재정비해야 하니 시간이 필요해 그랬을 테지만, 성소수자의 존재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의료진을 대하는 마음은 ‘올 게 왔구나’였다. ‘믿을 수 없는 사회’에 대한 확인이기도 했다. 내가 나가고 나면 또 자기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할까, 지역 사회 어딘가에 내 이야기가 풍문처럼 떠도는 건 아닐까. 가속도가 붙은 공처럼 불안은 끝도 없이 부풀고, 제대로 해소되지 못한 채 일상을 짓누르며 쌓여만 간다. 나름 적극적으로 그런 불안을 공략하고, 최대한 외부적 반응에 무감한 자신을 흉내 내며 ‘나만의 완충지대’를 만들었다고 믿지만, ‘우리 사회가 겨우 이 정도인가?’ 싶은 폭력과 혐오를 맞닥뜨릴 때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겨낼 방법은 없다.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릴 밖에는. 불안을 끌어안은 채 불안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는.

불필요했던 남성의 생식기를 제거하고 질을 재건하는 성확정 수술을 받은 지 어느새 20여년이 훌쩍 지났다. 재건된 성기에 관해 추적 진료를 받아본 적은 없지만, 이따금 몸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싶어 덜컥 겁이 난다. 수술을 받았던 개인 병원은 아직 폐업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으려나? 의료진이 혹시 교체된 거라면 다시 또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지? 내 의료기록은 폐기되지 않고 남아 있으려나, 나조차 모르는 내 몸을 물어오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내가 나이기에 나임을 알 뿐, 나 역시 내 몸에 무지하고 잘 모르기는 다른 사람들과 매한가지다.

의료도감에 그림으로도 남아 있지 않고 모형으로도 제작되지 못했던 몸. 결국 모호하고 흐릿할 수밖에 없는 그 몸에 관해 어디에서 어떻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잘 모른다. 수술로 짧아진 요도 때문에 최근에는 초기 요실금 증상도 시작된 것 같은데, 내 눈으로 직접 내 몸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수술한 그 한사람 말고는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으리란 불안을 좀처럼 떼어내기 어렵다. 그저 ‘늙는 몸’이라고 치부해버리고 싶은데, 뿌리가 달랐던 이 늙은 몸도 똑같이 처치를 받으면 그만인 건지, 한겹 더 불안을 끌어안는다.

늙음과 죽음 앞에 평등해지기 전에 누구라도 큰 사고를 당하면, 몸이 기억한다는 말이 있다. 자신은 전혀 그런 맘도 아니고 그러리라 예상하지 못했는데, 몸에 새겨진 불안이 저절로 튕겨 오를 때 사람들은 겁에 질리고 끝없는 나락에 처박히고 만다. 트랜스젠더인 우리는, 성소수자라는 사람들은 혐오를 마주할 때마다 그런 사고를 반복적으로 당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애를 쓰고, 이겨냈다고 믿고, 노련해졌다고 말하고 싶지만 돌아서면 그뿐이다. 흉터처럼 새겨진 불안이 제 몸을 휘감는다. 이 정도면 됐지, 과장되고 부풀린 언어들로 몸을 추슬러도 보지만, 쏘아진 공처럼 어디서 어떻게 영향을 받고 어디로 튕겨 오를지 알 길이 없다. ‘늙은 몸이 다 그렇지.’ 낡고 낡은 낙관(樂觀)을 한껏 끌어올리고 나면, 또 한 번 쪼그라든 자신을 확인한다.

그게 모두 당신이 자초한 일 아니냐, 또 혐오의 말들이 ‘팩트’를 빌미로 우리를 탓하겠지만, 그들도 노화와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아직 불안하지 않다면 충분히 늙지 않은 것일 뿐, 곧 그 불안은 온다. 늙음 앞에 그렇고, 죽음 앞에 그렇다. 그렇다면 우린 좀더 일찍 평등해질 수는 없는 걸까. 불안한 몸끼리 가진 걸 내어주고 서로 다른 모양으로 부풀었던 불안의 꼭지라도 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편견이나 선입견 따위는 애초부터 필요 없는, 아픈 몸을 이해한다면 말이다.

※김비 작가는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돼 등단했다. 소설집 <나나누나나>, 장편소설 <빠스정류장>·<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산문집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제주 사는 우리 엄마 복희 씨>·<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 등을 냈다. 한겨레신문에 ‘달려라 오십호(好)’를 연재 중이다.

<김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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