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 있는 의사라도 진료는 차별 없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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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나현 고려대 안암병원 젠더클리닉 교수

트랜스젠더는 병원 이용을 꺼린다. 겉보기 성별과 주민등록상의 성별이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본인 확인 절차를 거칠 때마다 원치 않는 아우팅을 당하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에 편견을 가진 의료진을 만나면 진료를 거부당하거나 모욕적인 말을 듣기도 한다. 성정체성과 맞지 않는 입원실이나 탈의실을 이용하는 불편함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은 알음알음 젠더 친화적이라고 알려진 병원을 찾아 먼 거리를 오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몸의 불편함보다 시선의 따가움이 더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진 / 강윤중 기자

사진 / 강윤중 기자

차별받는 소수는 뭉쳐야 산다. 트랜스젠더도 그들만의 커뮤니티 안에서 유용한 정보를 공유한다. 지난해 1월 고려대 안암병원에 젠더클리닉이 생겼다는 소식은 이내 빠르게 퍼졌다. 성별정체성과 관련한 의료 조치를 다학제적으로 담당하는 곳인데 대학병원 중에서는 국내 최초다. 트랜스젠더들은 이런 젠더클리닉이 많아지면, 그간 문제였던 의료접근성이 높아지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지난 4월 5일 고려대 의학도서관에서 젠더클리닉 설립을 기획한 황나현 교수(성형외과)를 만나 젠더클리닉이 성소수자 건강 증진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황 교수는 젠더클리닉이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 기준 완화 등 제도개선을 이루는 구심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성소수자 의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의대에 다닐 때 제일 친한 친구가 잡지사 기자였다. 트랜스젠더를 인터뷰하는 자리에 따라갔는데 그간 트랜스젠더에 대한 오해를 지울 수 있었다. 의료의 사각지대에서 건강상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 찾아보니 성형외과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전문의 시험을 보자마자 무작정 e메일을 보내 이 분야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스탠 몬스트리 교수가 있는 벨기에 겐트대학교 젠더클리닉에 연수를 다녀왔다. 이후에도 이 분야를 다룰 방법을 고민했지만 쉽지 않았다. 보수 성향이 강한 한국에서 대학병원이 선뜻 이런 클리닉을 여는 건 위험부담이 있었다. 다행히 지난해 성형외과 과장님과 원장님이 시대정신에 맞게 우리가 해보자며 전폭적으로 힘을 보태주었다. 특히 성형외과는 한국이 세계적인 위치에 있음에도 국내 환자들이 성확정 수술을 받으러 태국 등 해외에 나가는 게 안타까웠다. 브로커를 통한 피해도 크다고 하는데 우리가 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다들 생각했다.”

-개설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행정적인 문제,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는 태어난 성과 지향하는 성이 다른 분들인데 이들이 남자·여자 병실 중 어떤 병실에 들어가야 하느냐에서부터 막혔다. 원무과와 보험심사과 등 모든 행정파트와 조율해야 했다. 결국 담당교수가 환자의 상태를 파악해 적절한 병실을 지정하면, 원무과에서 그 병실을 배정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병원 확장 공사 중인데 트랜스젠더 전용 병실을 만들면 좋겠다. 물론 1인실을 쓰는 게 제일 편하고 해외에서도 대부분 1인실을 쓰지만 비보험이다 보니 비용이 만만치 않다. 정신건강의학과, 성형외과, 비뇨의학과, 산부인과 등 여러 진료과와의 다학제가 필요해 동료 교수를 설득하는 작업도 필요했다. 혼자서는 절대 못 한다. 성확정 수술도 외과와 산부인과가 협진해야 한다. 그런 팀을 꾸리는 것부터 시작해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정보력도 좋아서 시작할 때 간판만 걸어서는 안 된다. 길게 보고 제대로 준비해야지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운영 1년 3개월째를 맞았는데 그간의 성과를 소개한다면.

“젠더클리닉이라 해서 트랜스젠더만 진료하는 건 아니다. 간성환자들과 선천적으로 성기가 모호한 사람들까지 모두 아우르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별다른 홍보도 안 했는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이미 70분 넘게 오셨다. 수술을 희망하는 분들도 20명이 넘는다. 과거엔 가족과 등지고 호적에서 파였다는데 지금은 부모와 같이 올 정도로 가족의 지지를 받는 분들이 꽤 늘었다.”

-트랜지션 과정에서 성전환증 진단코드는 꼭 필요한가.

“세계트랜스젠더보건전문가협회(WPATH)의 가이드라인을 우리도 따른다. 호르몬 치료나 수술을 받으려면 일단 (성전환증·성주체성 장애로 불리는) F64 진단코드를 받아야 한다. 1년 이상 호르몬 치료를 한 후에 성확정 수술을 고려할 수 있다. 외과적 수술로 성기를 제거하면 평생 호르몬 주사를 맞아야 한다.”

-성별 정정 요건이 너무 까다롭다는 의견이 있다.

“의료적 트랜지션 과정의 피라미드를 하나라도 끊어주면 좋은데 한국은 성별 정정이 너무 어렵다. 건강보험이 안 되는 문제도 있고. 또 성별 정정을 하려면 반드시 수술을 받아야 한다. 불임이냐 아니냐를 보기 때문에 질 성형을 했냐 안 했냐까지 판사들이 너무 구체적으로 파고든다. 남자면 성기를 제거했는지, 여자는 자궁과 난소를 적출했는지까지 물어본다. 외국에선 굳이 새로운 질을 만들지 않아도 성별 정정이 가능하다. 지금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과 관련한 법이 존재하지 않아 판사가 사무처리지침을 참고해 재량으로 판결한다. 운이 좋으면 바뀌고 그렇지 않으면 몇달씩 기다려야 한다. 판사가 완전 보수적이면 그냥 기각할 수도 있다. 예규로만 돼 있어 기준과 절차가 명확하지 않다.”

고려대 안암병원 젠더클리닉 황나현 교수가 4월 5일 고려대 의학도서관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고려대 안암병원 젠더클리닉 황나현 교수가 4월 5일 고려대 의학도서관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성별 정정 기준 완화가 중요한 이유는.

“성별은 법적 서류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번듯한 직장을 구하려고 해도 ‘이력서 주민등록번호란에 1인데 왜 제가 1이야’ 이런 식으로 문제 삼게 되면 취업이 어려워진다. 악순환의 시작이다. 호르몬 요법 비용이나 수술비용은 비보험이라 비싼데 비용을 마련하려면 직장을 구해야 한다. 그런데 빠르게 성별 정정이 안 되면 이런 게 다 어그러진다. 최근에 조금씩 간소화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준비할 서류가 많다. 특히 가족진술서는 부모가 이혼한 환자들에게는 심한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이 역시 간소화돼 참고서류가 됐다고 하지만 혹시나 거절당할까봐 많은 환자가 준비하고 간다.”

-젠더클리닉의 역할은.

“성별 정정이나 건강보험 등 하나라도 제도가 바뀌어야 하는데 대학병원에서 젠더클리닉이 만들어지면 목소리를 내는 데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역에서 암암리에 수술하는 경우도 많은데 대학병원 젠더클리닉이 많아지면 환자의 선택지가 넓어질 수 있다. 나도 이 일을 혼자 할 생각은 없고, 관심 있는 후배, 동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뜻이 맞는 동료 10명 정도가 모여 성소수자 연구회를 만들었다. WPATH에서 새 지침이 나오면 한국말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세미나와 토론회도 연다. ‘차별 없는 병원’이라는 가제로 트랜스젠더의 건강과 관련한 책도 함께 쓰고 있다. 국회토론회를 통해 성별 정정 수정안도 만드는 중이다. 수술 없이도 성별 정정이 가능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본인이 성별을 바꾸길 원하는데 왜 꼭 수술을 해야만 정정할 수 있느냐는 문제 제기다. 아직 초기 단계지만 이런 성과가 쌓이면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차별금지법 제정이 트랜스젠더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까.

“성별 정정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게 차별금지법이다. 정치인들이 눈치를 보면서 정략적으로 활용하면서 아직도 통과되지 못했다. 각 분야에 ‘K’가 붙을 정도로 선진국이 됐다고 하지만 차별금지법이 없다는 건 어디서 말도 못 할 정도로 창피한 일이다. 성소수자 부모모임이 있는데 국회 앞에서 시위를 많이 한다. 이들의 활동을 찍은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이 최근 개봉됐다.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봤는데 왜 차별금지법이 필요한지 정리가 됐다. 물론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진다고 세상의 모든 차별을 다 없앨 순 없다. 하지만 적어도 세상을 살만하게 바꿀 순 있지 않을까. 어렸을 때 외국에서 살 기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에서도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있다는 걸 가르치는 걸 본 기억이 난다. 한국도 시대정신에 맞게 가야 한다. 인권과 젠더이슈에서 뒤처져 차별금지법도 통과되지 않지만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조치는 영국 등 대부분의 유럽 국가와 미국에선 건강보험은 물론 사보험에서도 보장하는 추세다.”

-의료인 대상의 성소수자 교육도 필요해보인다.

“미국의 아이비리그나 해외 유명 의대의 교육과정에는 성소수자 의학이 다 들어가 있다. 진료할 때 접근법이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하면 차별 없이 진료할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 의사는 편견이 있다고 해도 진료는 차별 없이 해야 한다. 서울대 의대가 지난해 1학기부터 ‘성소수자 건강권과 의료’ 수업을 개설했다.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 의료를 배우는 수업을 개설한 건 국내 의대 중 처음이다. 인기가 많아 아예 정규 과목으로 들어갔다. 비슷한 사례가 더 많은 의대로 확산되면 좋겠다. 트랜스젠더는 병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따가운 시선에 위화감을 느낀다. 차별 없이 진료하려는 의료진의 인식이 정말로 중요하다. 대학병원 젠더클리닉만이 아니라 다른 과를 갔을 때도 편하게 위화감 없이 진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만드는 게 또 하나의 캠페인 목표다. 모든 사람이 환영받는 병원, 차별 없이 진료하는 병원을 지향한다.”

-미 국무부는 지난 3월 31일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을 맞아 여권에 제3의 성을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남자·여자로 나누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성별대로 쓸 수 있게 하는 게 요즘 트렌드다. 우리가 K팝으로 글로벌 인지도를 높였지만 다양성이나 포용력, 차별의 문제에서는 굉장히 갈 길이 멀다. 흑인의 생명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정작 성소수자를 위해 나서는 사람은 없다. 법적 성별을 1과 2로 구분하는 개념을 없애자는 분도 있고, 성별 구분을 운전면허증이나 주민등록증에서 없애자는 의견도 있다. 어느 것 하나라도 된다면 트랜스젠더들의 사회활동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일 것이다.”

-트랜스젠더 통계조사가 필요하다고 보나.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지가 문제다. 지난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F64코드 진단을 받았는지 10년간의 추이를 보고 싶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F64코드 진단 관련 데이터를 문의했는데 데이터가 없다고 하더라. 성별 정정이 되는 순간 그 이전의 의료기록이 모두 사라진다. 과거가 사라지면서 기록이 추적되지 않는 게 큰 문제다. 뭐라도 기록이 있어야 접근할 수 있는데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다. 국가가 이분들한테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트랜스젠더들이야 성별 정정 후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 과거를 지우기도 하지만 의료진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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