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장애’를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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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싶을 뿐인데 머리카락을 자르는 심정을 비장애인들은 헤아릴 수 있을까. 장애인들은 지난 3월 30일부터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승강장에서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에 대한 확답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요구하며 한명씩 삭발을 이어가고 있다. 2001년 오이도역, 2002년 발산역에서 장애인들이 리프트를 타다가 추락해 사망한 이후 갖은 투쟁으로 받아낸 약속들은 20년 동안 지켜지지 않았다. 장애인들은 이번에는 “약속이라도 해달라”며 또다시 쇠사슬로 몸을 묶었다.

지난 3월 30일 서울 종로구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승강장에서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장이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요구하며 삭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3월 30일 서울 종로구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승강장에서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장이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요구하며 삭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장애인들의 요구사항은 ‘반문명적’이지 않다. 일하고 싶고, 교육받고 싶고, 시설에서 나와 혼자 또는 좋아하는 사람과 살고 싶어한다. 모두 ‘이동’이 보장돼야 가능한 일이다. 장애인들은 저상버스가 올 때까지 여러대의 버스를 지나쳐 보내고, 지하철을 탈 때는 역사 내 엘리베이터 설치 여부와 위치 등을 고려해 빙 돌아간다. 장애인 콜택시를 불러도 하염없이 기다리다 포기하기 일쑤고 야간 이용은 제약이 크다. 지하철 1역사 1동선 확보, 저상버스 확대, 교통약자이동지원센터 운영비의 국고 지원을 요구하는 이유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사이 공방을 전하는 기사를 쓰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장애를 장애로 만드는 건 무엇인지, 정작 필요한 질문은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장애인들에게 한국사회는 끊임없이 “미안해해야” 하는 곳이다. 위치를 바꿔보자. 노르웨이, 스웨덴 같은 국가에서 장애인들은 한국 장애인들만큼 미안해하지 않는다. 대중교통, 일터, 학교, 음식점 등 곳곳에서 장애인을 마주한 경험이 적다면 의심해봐야 하지 않을까. 263만명(2020년 기준 등록장애인 수)은 지금 다 어디에 있는 걸까.

이 질문을 의제화해 정책으로 발전시킬 힘이 있고, 또 그래야 할 이 대표는 자신의 자원을 단체의 시위를 비난하는 데 썼다. 장애인을 혐오하는 글·영상이 퍼져나갔고, 시위에 나선 장애인들은 한층 더 거세진 폭력에 온몸으로 부딪혀야 했다. 혐오의 빗장을 이 대표가 풀어준 셈이다. 언론도 혐오를 덧씌우는 데 일조했다. 의혹의 진위를 가리거나 주장을 검증하기보다 생중계하듯 보도해 조회수를 올렸다.

언론을 대신해 질문을 던진 건 단체의 출근길 선전전 현장을 찾아 힘을 보탠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비장애인 중심으로 짜인 사회 구조를 짚었다. “손상이라는 요인은 그대로인데 버스를 탈 수 있기도 하고 탈 수 없기도 하다면, 문제의 원인은 그 사람의 몸이 아니라 바로 버스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김도현·<장애학의 도전>) 장애를 장애로 만드는 구조를 방관한 책임주체를 소환해야 한다. ‘이준석 대 박경석’ 토론이 아니라 ‘기획재정부 대 이준석-박경석’ 토론을 제안하고 싶다. 이 대표는 “여야가 합의해 통과시킨 교통약자법 개정안에서 기재부가 국비지원 조항을 반대해 시위가 길어진 게 아니냐”고 따져 물어야 한다. 박 대표는 기재부 앞에서 했던 시위만 나열해도 ‘필승’이다. 이동하기 위해 삭발까지 해야 하는 사회는 너무 가혹하다.

<박하얀 사회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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