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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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이 최근 신작 장편소설 <페스트의 밤>의 한국 출간을 계기로 기자들과 가진 화상 인터뷰에서 “중세가 다시 오고 있다”고 했다지요. 로마 가톨릭의 ‘전성기’였던 중세(5~15세기)는 이상기후에 따른 기아·기근과 전염병인 페스트(흑사병)의 창궐, 교황권 약화와 왕권 강화로 이어진 십자군전쟁 등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이 희생을 치르면서 암흑의 시대로 불리기도 했는데요.

[편집실에서]대성당들의 시대

적고 보니 5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이 놀라우리만치 당시와 흡사합니다. 작가의 말처럼 전쟁(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감염병(코로나19)이 전 세계를 휘감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로 대형산불이 발생하고 이상고온 현상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커진 두려움만큼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위기의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려 희생양을 찾으려 했던 중세 ‘마녀사냥’식의 혐오와 편견이 무서운 속도로 고개를 드는 현상도 어쩐지 심상치 않습니다. 지역, 세대, 연령, 성별 갈라치기도 모자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갈라치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여기저기서 파열음이 들립니다. 적포도주를 곁들인 봄나물비빔밥·탕평채 만찬으로 한숨 돌렸다지만 신구 권력 갈등은 어디로 튈지 모르겠고, 지방선거를 앞둔 여야 정치권의 날선 공방도 아슬아슬합니다. 수사지휘권 폐지니 검수완박이니 쟁점은 선명한데 앞날은 한치 앞을 모르겠습니다.

오는 8월이면 시행 2년을 맞아 갱신권 만료 매물이 쏟아지기 시작할 ‘임대차 3법 손질’의 종착역은 어디쯤일까요. 김정은의 속내도 알 수 없지만 윤석열 당선인 측의 대응 또한 아리송합니다. 돈 들어갈 일투성이인 공약과 감세정책 기조 사이의 괴리는 어떻게 풀겠다는 건지요. 우크라이나의 앞날은 어떻게 될지, 북·중·러 vs 한·미·일 신냉전 구도가 불러올 파장은 또 어디까지 번져갈까요. 새판짜기를 앞둔 ‘혼돈’이라 하기엔 이 4월이 너무 잔인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십자군전쟁처럼 중세를 특징짓던 요소들이 폐쇄적인 봉건제 사회를 무너뜨리고 인본주의와 인문학을 꽃피운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젖히는 ‘일등공신’ 역할을 했습니다. 절대자로 군림하던 성직자들도 페스트의 위력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면서 교회의 권위는 급격히 추락했습니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가 중세의 붕괴를 배경으로 쓴 동명 소설을 뮤지컬로 만든 작품 <노트르담 드 파리>의 도입부에 ‘대성당들의 시대’라는 넘버가 나옵니다. 워낙 유명한 곡이어서 뮤지컬은 못 보셨더라도 많은 분한테 익숙할 텐데요. 요즘처럼 뭔가 꽉 막힌 듯 답답하고 스산한 계절에 아주 잘 어울리는 곡입니다. 좀처럼 오지 않는 봄, 대성당의 시대가 가고 이성의 시대가 왔듯이 ‘따뜻한’ 봄도 끝내 오고야 말겠지요.

<권재현 편집장 jaynew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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