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경제는 이제부터 문화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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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의 속도가 중요하던 시절이 있었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너무 긴 세월 근대문명과 거리를 둔 채 살아온 한국은 근대사의 질곡 속에서 외세에 의해 개방됐다. 서구 정치제도가 도입되고 나아가 서방의 산업기술과 시장경제가 일순간에 뿌리를 내렸다. 대체로 급한 성격의 우리 산업사회는 당시 군사정부의 주도로 정치 민주화와 인간사회 발전을 뒤로 한 채, 단순노동의 경공업에서 출발해 기술집약적인 중화학산업과 자본지식집약적인 첨단산업, 문화서비스산업 등으로 경제근대화의 속도를 날로 가속화했다. 소위 지구촌 인류사에 전무후무한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 그 바람 같던 속도감은 1997년 외환위기를 지나며 상당 폭 안정화됐지만, 아직도 상당수 국민의 가슴 속에는 고도 경제성장과 급속한 양적 변화의 열망이 크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한국은 이제 어느새 국민소득 4만달러의 문턱을 바라보고 있다. 프랑스, 일본, 영국, 독일 등이 오래 머물고 있는 이 고소득 지대를 넘보고 있다. 최근에는 이탈리아를 제쳤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와중에서 조용히 이룬 기적 같은 성과다.

우리가 봐도 쉽게 믿기지 않는 이 실적은 돌연 사회적 거리가 생기고, 긴 시간 동안 온통 거리가 폐쇄돼도 한국의 산업기술과 기업시스템은 세계의 애호와 성원을 받으면서 사상 최고의 수출 실적을 연일 기록하며 이룬 개가다. 그 뒤에는 유능한 인재를 찾아내는 학교시스템과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개발 투자가 가능한, 내부에 유보된 막대한 기업자본력이 힘이 됐다. 물론 그 이면에 상대적으로 소홀히 된 평등 교육이나 기업이익의 사회 배분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우리 사회의 사람은 정치·사회적 존재

이런 구조에서 한국은 수출산업이나 국제경제 활동에 깊이 일상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개인이나 가정이 아무리 나라가 발전해도 스스로 갖게 되는 개인소득 향상이나 가계재정 확장의 기회가 평균적으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산업사회는 대외경쟁력이 낮은 지역이나 가정, 개인은 국가 전체의 경제성장 발전을 다같이 향유하기 어려운 형편의 나라라고 하는 점이다.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이나 기업인들이나 온 국민이 이를 잘 알아둬야 한다. 그러한 근본적인 차이는 정치개혁이나 행정관리나 사회제도가 지혜롭게 작동해 국민에게 질 좋은 삶이 가능하도록 잘 보정해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다.

당장 봐도 최근의 반도체, 2차 전지, 소재, 부품, 장비, 문화, 정보서비스 등이 코로나19 와중에서도 크게 벌어들인 대외 수출 활동의 기업이익이나 재능집단의 수익은 일반적인 저소득층이나 자영업자들이 코로나19로 겪은 지독한 사회 고충의 생계 여건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이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해결하기 어렵다. 산업의 과학화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국가경제 구조혁신이 가져온 시대적인 정치·사회 문제이기 때문이다.

경제와 산업, 기업이 사람들의 조직력과 열정으로 돌아가던 시절과 달리, 이제는 지식기반의 과학기술과 지능운영 시스템이 생산과 유통과 물류산업을 주도하는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국가정책에서 사람들의 문제가 점점 정치적인 주제로 새롭게 이동하고 있다. 결단코 우리 사회의 사람은 정치·사회적인 존재라고 규정해도 무방한 시대가 됐다. 오래도록 선진국 경제사회가 사회적 가치생성과 사회적 분배의 정당성을 내세워 확립한 사회적 경제가치 이념체제인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란 단어를 사용하기도 어렵다. 어느새 한국 선거판도 국민 개개인이 생존 수단을 걸고 뜨겁게 부딪치는 공간이 돼가고 있다. 젊은 국민이 보여주는 정치 참여의 열기는 곧 그들 개인의 미래 생존 문제와 연결돼 있다.

이 현상들이 혹자에게는 성 어젠다로 보이고 누구에겐 지역 이슈로 비쳐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세대갈등으로 나타난다. 정치 현장은 전통적인 국가 이념이나 지정학적인 정치 견해, 또는 민족적인 사회정서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당장과 미래의 개인 생활여건이나 가족의 생계환경에 영향을 주는 생계 정책을 다루는 정치인들에 주목하고 어떤 정치집단이 ‘나한테 유리한가’를 잣대로 선택하고 지지하는 노골적인 경향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국민 각자도생이다. 살려면 정치적 진로를 잘 정해야 한다고 믿는 시대, 이른바 생존의 정치투쟁 시대가 열린 셈이다.

이 논의가 한걸음 더 나아가면 삶의 질을 경제성장 지표와 같이 놓고 다루는 ‘경제가치의 문화적 치환 세상’과 만난다. 성장을 살짝 비켜가면서 이미 이런 길을 걷기 시작한 나라들도 있다. 뉴질랜드와 캐나다가 그렇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국민소득 3만달러대에 도달했지만, 아직 4만달러대에 머물러 있다. 같이 가던 미국이 이들을 훨씬 앞질러 6만달러까지 내처 달려갔지만 조급해하지 않았다. 캐나다와 뉴질랜드의 정책시선은 대신 국민의 ‘삶의 질’을 향하기 시작했다. 캐나다에는 중산층번영부라는 부처가 있다. ‘중산층 번영’이라는 경제·사회복지 정책의 목표를 정하고 꾸준하고 일관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무작정 성장·번영만 갈구하면 안 돼

요즘 노르웨이도 웰빙지표라는 것을 경제사회 발전의 목표로 개발 중이다. 서방에는 WEGo(Wellbeing Government)라는 작은 국가연합체가 있다. 뉴질랜드, 핀란드, 스코틀랜드, 아이슬란드, 웨일스가 가입된 웰빙경제 연합체인데 요즘 노르웨이와 캐나다가 다음 가입멤버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최근 노르웨이 국민을 상대로 한 질문에서 26%가 “삶의 질이 높다”고 답했고, 22%가 “그렇지 못하다”고 답했다. 노르웨이는 1인당 국민소득이 10만달러가 넘는 세계 최고의 소득구조를 가진 나라인데 국민의 속내는 정작 이렇다. 경제발전과 개인 행복감은 다른 세계의 가치인 셈이다.

곧 정부가 새로이 바뀔 예정이다. 순탄한 흐름이라면 다음 대통령은 임기 중에 국민소득을 4만달러 근처로 성장시켜야 할 순번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예를 보면 여기서부터는 소수의 엘리트와 자본가들이 주도해 앞으로 나아가는 경제고도화 국면이 전개되기 십상이다. 최근 덴마크, 스위스, 노르웨이 등 국민소득 6만~10만달러대 국가들의 불평등계수인 지니계수가 모두 0.4 이상으로 한국(0.3 이상)보다 높다는 사실이 국민소득이 증가하면 빈부격차도 더 커질 수 있음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경제발전만이 능사가 아니다. 새 정부가 성숙한 국가운영의 묘를 발휘해야 할 시점이다. 무작정 성장과 번영만을 갈구하면, 그 이면에 행복감을 놓쳐가는 국민의 시름이 속절없이 늘어간다. 우리 경제는 이제부터 더 이상 ‘경제재’가 아니라 ‘문화재(culture good)’다. 국민이 소득 이상으로 소회(cherished intention)를, 자산보다 자신(self esteem)을 더 소중히 여기는 ‘심상(心相)’의 구간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엄길청 국제투자분석가·전 경기대 경영전문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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