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전쟁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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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무엇보다 전쟁과 정치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가장 표준적인 답은 ‘전쟁의 철학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18세기 초에 제안한 정식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전쟁이란 국가가 사용하는 여러 수단 중 하나일 뿐이며, 정치적 수단과 전쟁은 연속적이라는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의 존재 이유는 인간성의 보호와 실현에 있지만, 역설적으로 국가 주권은 전쟁을 사용 가능한 수단으로 인정한다. 여기서 전쟁에 대한 이중적 태도가 나온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서구 국가들의 반응을 비교해보라. 지금 우크라이나 난민을 환대하는 유럽 국가들이 그동안 중동과 아프리카 난민에게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떠올려보자. 전쟁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는 반인간적 행위지만, 국가는 전쟁이 자신에게 어떤 피해와 이익을 가져올지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자마자 주식시장부터 확인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주한 러시아인들이 3월 12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우크라이나 침공 중단 촉구 집회’를 열어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 범죄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주한 러시아인들이 3월 12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우크라이나 침공 중단 촉구 집회’를 열어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 범죄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하지만 전쟁이 정치의 수단이라는 정식은 치명적 위험을 내포한다. 수단은 목적을 변형시키게 마련이고, 심지어 수단과 목적의 관계가 역전되기도 한다.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출현한 전체 전쟁(total war)과 수십년간 지속된 냉전체제는 그러한 위험이 단지 가능성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모든 전쟁은 ‘국익’을 목적으로 삼지만, 정작 전쟁이 시작되고 나면 정치와 사회적 삶 전체가 왜곡되며, 도대체 무엇이 국익인지 알 수 없어진다. 지금 러시아를 보자. 국가가 전쟁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국가를 이용하고 있다.

K방산의 자랑스러운 성공? 한반도는 가장 참혹한 현대 전쟁이 일어났던 곳이지만, 전쟁 자체가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된 적은 별로 없다. 한국인의 지정학적 인식 범위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제한됐고, 거기엔 오로지 ‘국가 안보’와 ‘한반도 평화’에 관한 논쟁만 존재한다. 다른 지역에 대규모 폭력과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행위자보다 관전자의 태도를 취한다. 아마도 이런 태도는 ‘세계열강의 침략에 시달려온 피해자’라는 의식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꽤 오래전부터 전 세계적 분쟁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베트남전 파병 규모는 미국 다음이고, 이라크전에 군대를 보낸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최근에는 세계 무기 수출 9위를 자축하며 ‘K방산’이라는 말까지 쓰고 있다.

신기한 점은 이에 관한 윤리적 논쟁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양민학살이 폭로되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사회적 논의는 별다른 진전이 없다. 2016년에 공개한 영국의 칠콧보고서는 자국의 이라크전 파병이 부적절했다고 평가했지만, 한국에서 이라크전 파병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 자주포 판매와 반도체 판매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인식한다. 무기 수출도 결국 수출이고, 수출은 어쨌든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터키가 한국산 최루탄을 시민들에게 발포하고 한국 기술을 수입해 만든 자주포로 쿠르드를 공격했을 때도 별다른 논란이 발생하지 않았다. 소수의 인권 활동가들만이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낼 뿐이다.

근대 국가에서 전쟁에 관한 두가지 이해는 늘 충돌한다. 한편에는 ‘전쟁은 국익을 위한 수단이다’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전쟁은 용납 불가능한 반인간적 행위다’라는 윤리적 원칙이 있다. 한국에서는 이런 충돌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익이 윤리를 압도하고, 윤리적 질문은 필요성을 상실한다. 결국 자신을 침략 전쟁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에 가장 충실하게 행동하는 아이러니한 광경이 펼쳐진다.

전쟁과 정치 한국의 보수 우파와 민주화 세력은 남북관계를 놓고 항상 갈등한다. 과거 군사정권은 ‘다시 한번 붙어보자’는 식으로 북한을 대했고, 이 태도는 지금도 보수 우파의 정신세계를 지배한다. 민주화 운동 세력은 이들에 맞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해왔지만, 전쟁에 대한 두 진영의 태도는 별반 다르지 않다.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것은 노무현 정부였고, 문재인 정부는 이집트에 자주포 수출을 자축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전 지구적 평화라는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수다.

윤리적 성찰이 부족한 건 전쟁을 잘 몰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전쟁은 한국인에게 너무나 친숙하다. 여전히 냉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반도에서 군사 조직과 행동은 일상적이고 정상적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군대 복무 경험이 개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군대 예능이 만들어진다. 여전히 많은 사회 조직이 군사 조직처럼 운영된다. 국가 안보란 외부의 위협에 맞서 시민 전체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군사적 목적에 따라 시민의 안전을 희생시킬 때 저 말을 쓴다. 그렇게 제주 강정의 지역공동체를 파괴하며 해군기지를 건설했고, 사드는 적법한 절차없이 성주에 배치했다.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에 내포된 위험을 확인하려면 한국을 보면 된다. 정치가 전쟁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순간 목적과 수단, 정치와 전쟁의 구별 자체가 모호해진다.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 문화, 무기가 정치적 삶에 침투하며, 정치의 작동 방식 자체를 바꿔버린다. 전쟁은 일상적 대상이 되고 헌법적 가치를 무력화하기도 한다.

현대 국가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군사적 수단의 사용이 정치의 본래 목적을 왜곡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이라크 전쟁을 시작했을 때, 미국 민주주의가 직면했던 위협을 떠올려보자.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나면 결과가 어찌 됐든 러시아의 내부 정치는 수십년 후퇴할 것이다. 한국에선 정치와 전쟁이 오래전에 한덩어리가 돼버렸고, 이제는 이 둘을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생소하다.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하겠지만 이와 상관없이 한국의 군대와 무기는 세계로 수출할 것이고, 국가 안보라는 이름 아래 시민들의 기본권을 무시할 것이다. 전쟁을 막는 건 정치의 기본 임무지만 그것이 최종 목적은 아니다.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군사적 노력을 지속하되,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침범하지 않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하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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