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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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살이 벌써 15년, 아직도 나는 내 방이 남의 집인 양 낯설다. ‘제대로 된 집을 사면’, ‘결혼을 하면’ 같은 온갖 가정으로 정리정돈을 미룬다. 그러면서도 욕심은 많아서 잠 못드는 밤 가끔씩 ‘오늘의 집’이나 네이버 리빙 섹션을 뒤적인다. 취미는 도서 수집이다. 덕분에 좁은 방에서 내 동선은 늘 구불구불하다. 어지러운 선이 어째 방의 나이테 같아 조금 슬픈 마음에 잠들기도 한다.

중학교 2학년 때 구입한 삼성 마이마이 MY-M8500과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엄마에게 선물한 기념품. 고향집을 정리하던 중 찾았다. / 조문희 기자

중학교 2학년 때 구입한 삼성 마이마이 MY-M8500과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엄마에게 선물한 기념품. 고향집을 정리하던 중 찾았다. / 조문희 기자

넷플릭스 리얼리티 쇼 ‘설레지 않다면 버려라’를 본 후에는 삶이 조금 달라졌다.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가 미국인 가정을 방문해 정리를 유도하는 영상이다. 그녀의 방식은 단순하다. 방문한 가정에 늘 ‘가진 것을 모두 꺼내라’고 주문한다. 옷, 책, 인형, 사진을 하나씩 내놓다 보면 어느덧 물건이 산처럼 쌓인다. 경악하는 집주인의 곁에서 애칭 ‘곤마리’ 여사는 말한다. “하나씩 만져 보세요. 그리고, 설레지 않다면 버리세요.”

곤마리의 조언을 따라 자취방을 치우고 나니 고향집이 눈에 밟혔다. 엄마가 최근 몸이 좋지 않아 정리를 못했다는데, 그렇다기엔 유통기한을 2년 넘긴 김 상자가 방구석에 멀뚱했다. 기억 속 먼 과거에도 엄마는 어린 자녀의 미래를 대비해 큰 옷을 사고, 몸이 커지면 누군가에게 물려준다며 창고에 넣는 사람이었다. “내가 버릴게!” 주말을 태운 청소가 시작된 배경이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글자가 새겨진 하트 모양 나무판넬은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가져온 기념품이다. 어느 여행지에서 팔아도 그럴 듯해 오히려 아무도 사가지 않을 법한 선물. 바로 쓰레기 봉투에 집어넣으려는 내게 엄마는 말했다. “아들이 처음 선물한 거잖아.” 중학교 2학년 때 영어 공부를 핑계로 구입한 마이마이는 어떨까. 엄마는 몰래 산 음악 테이프를 밤새 돌려 듣던 아들의 모습을 기억했다. 허술한 내 범행을 기록하듯 마이마이엔 ‘UN 2집’ 앨범이 꽂혀 있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도 쉽지 않았다. ‘number sugar(넘버 슈가)’ 글자가 적힌 작은 상자는 4년 전 내가 일본 여행을 다녀오면서 선물한 캬라멜이다. 슬쩍 보니 하나도 먹지 않은듯 했지만 ‘왜 안먹었냐’고 굳이 묻지 않았다. 돌아올 답이 뻔했다. “아까워서 그랬지.”

“설레지 않다면”이란 가정은 감정의 유통기한을 전제하지만 감정의 기한을 측정하는 법은 모호하다. 오늘 설레지 않은 물건이 내일은 추억을 가져올 수 있다. 애정이 완전연소해 묻어둔 옛 연인의 편지도 이따금 보면 한 시절 기억으로 뭉클하듯이. 유통기한이 지난 파인애플을 먹어치운 영화 중경삼림 속 경찰 233도 캔을 버리지는 못했을 거라 믿는다. 다 버려야겠다고 다짐한 날 하필 어린 날 자식과 젊었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인생인가, 요즈음 드는 생각이다.

서울 집 옷장 앞에서 한 벌 회색 정장을 본다. 첫 직장 필기시험에 합격한 날 엄마가 서울에 올라와 사준 옷이다. 면접 날 한 번 입고 찾은 적 없었는데, 이제는 체형이 변해 종아리도 잘 들어가지 않는다. 버려야 할까. 상한 캬라멜의 비릿한 냄새를 떠올리며 나는 정장을 다시 옷장에 넣는다.

<조문희 정치부 기자 moon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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