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쓸모없는 사람인가, 다시 일할 수 있을까”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한국산연 해고노동자 백은주씨, 왜 끝까지 싸우나

“당사는 회사의 회생을 위해 노력했으나 10여년간 지속된 누적 손실로 인해 더 이상 정상적 경영이 불가능한 상황이 됐습니다. 이에 불가피하게 2021년 1월 20일자로 폐업(한국산연 법인해산)하게 됨을 알려드립니다. 귀하는 단체협약 제44조의3에 따라 6개월 후인 2021년 1월 20일에 상기 사유로 당사와의 근로관계가 종료됨을 알려드립니다.”

한국산연 노동자와 연대하는 일본 시민들이 지난 2월 24일 일본산켄전기 본사 인근 전철역에서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다. / 금속노조 한국산연지회 제공

한국산연 노동자와 연대하는 일본 시민들이 지난 2월 24일 일본산켄전기 본사 인근 전철역에서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다. / 금속노조 한국산연지회 제공

2020년 7월 15일, 스마트폰 문자메시지 진동음이 들렸다. 입사 뒤 두 번째로 받은 해고통지서였다. ‘폐업이면 이대로 끝인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마산자유무역지역에 있는 공장 정문과 2층 화장실에도 같은 내용의 공고문이 붙었다.

회사는 한달 전부터 “일감이 부족하다”며 휴업하려 했다. 동료들은 회사 정문 앞에서 노동조합과의 합의 없는 일방적 휴업 통보에 대한 항의를 이어갔다. 이후 휴업에 합의했지만 “노조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라는 한 관리자의 말이 뭔가 찜찜했다. ‘저게 무슨 의미일까’ 하며 의아해하던 중 한 동료가 7월 9일 일본 산켄전기(한국산연의 모회사) 홈페이지에 한국산연을 청산한다는 내용이 올라왔다고 다급하게 알려왔다.

2015년 공장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한 뒤 노조(금속노조 한국산연지회) 사무실로 쓰고 있는 2층 남자 휴게실로 동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지회장이 상황을 공유하니 모두 멍해졌다. 설마 설마 했는데 폐업이라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스무 살에 만난 한국산연

갓 스무 살이 되던 해(2001)에 한국산연에 입사했다. 고교 졸업 뒤 첫 직장은 회계사 사무실이었다. 몇개월간 단순 입력 작업, 전표 처리만 반복하다 보니 ‘내가 여기서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심 끝에 “수능을 본다”고 둘러대고 회사를 나왔다.

우연히 전기기계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던 고교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친구는 한국산연 입사를 권유하면서 “빈자리가 생기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두달 뒤쯤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이력서를 챙겨가 간단한 면접을 봤다. 바로 생산라인에 배치가 됐다. 임금도 최저임금보다 조금 높았고, 보너스가 나오는 달도 있었다. 간호사로 일하는 쌍둥이 동생보다 벌이가 더 좋았다.

공장에서 먼저 일했던 언니들은 ‘1997년’을 종종 이야기했다. 1996년 민주노총을 상급단체로 둔 노조가 들어섰고, 그해 말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이 있었다. 이듬해 일본 산켄전기 본사는 한국에서 철수하고 인건비가 싼 인도네시아로 공장을 옮기기로 했다. 1년이 넘는 공장점거 투쟁 끝에 주주총회 결정을 번복하고 공장 정상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또 다른 ‘1997년’이 반복될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일본 원정투쟁을 거쳐 복직까지

2016년 2월 회사는 만성 적자를 이유로 생산직 노동자 전원에게 정리해고 예고통지서를 발송했다. “생산부문의 폐지를 통해 직접생산을 외주생산으로 전환하고, 한국산연을 영업전문회사로 개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처음으로 받아본 해고통지서였다.

희망퇴직 공고도 여러차례 이어졌다. 희망퇴직을 신청해 위로금이라도 받으라는 건데 우리의 불안한 심리를 파고들려는 시도였다. 그해 9월까지 생산직 34명, 관리직 19명이 희망퇴직 형식으로 회사를 떠났다. 희망퇴직은 사실상 정리해고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회사는 5월 12일 생산업무를 중단했고, 유급휴업 기간을 거쳐 9월 30일 나를 포함한 생산직 노동자 35명을 정리해고했다.

노조는 6월부터 일본 원정투쟁에 돌입했다. 일본 본사를 움직이기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동료들이 순번을 정해 한달가량 일본에서 지내다 돌아왔는데 내 차례는 12월이었다.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는 계기가 복직 투쟁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일본어도 못하고 체력도 약해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처음 비행기를 탄다는 걸 안 일부 동료들은 “기내에 신문이 있는데 돈 내고 봐야 한다”, “기내에 신발 벗고 들어가야 한다”며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했다.

일본 나리타공항에 내린 뒤 느낀 막막함은 연대의 힘을 보여준 일본 시민들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다. 나보다 먼저 다녀온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처음엔 숙소 마련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부동산업소를 통해 장기 임대를 하려 했지만 외국인이고 신분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계약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한국산연 정리해고 문제에 관심을 가진 한 일본 시의원이 우리 사정을 알고 “형님댁이 비어 있으니 거길 써도 된다”고 제안했다. 덕분에 집회, 선전전, 항의방문 등을 마치고 편히 쉴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나중에 임대료를 드리려고 했지만 그 시의원이 사양했다는 이야기를 은형 언니(김은형 금속노조 한국산연지회 지도위원·민주노총 부위원장)로부터 전해 들었다.

한국산연 해고노동자 백은주씨가 지난해 1월 21일 회사로부터 받은 ‘근로관계 소멸 통지’ 문자메시지 / 백은주씨 제공

한국산연 해고노동자 백은주씨가 지난해 1월 21일 회사로부터 받은 ‘근로관계 소멸 통지’ 문자메시지 / 백은주씨 제공

우리의 목소리를 일본어로 통역해준 분들도 잊히지 않는다. 다섯분 정도가 매일 돌아가면서 사이타마현 산켄전기 본사 앞 집회 때 통역을 해줬는데 특히 가토상은 엄마 같은 분이었다. 부산에서 8년가량 살아 한국어에 능통한 그는 빨간 날이면 반복된 일정에 지친 우리에게 음식도 사주고, 근처 식물원 같은 곳에 데려가 주기도 했다. 일본어를 할 줄 알면 덜 신세를 졌을 텐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일본 시민단체 ‘한국산연 노동자를 지원하는 모임’의 오자와상도 난로며 식기며 우리에게 필요한 물품을 보따리에 싸서 전해주었다. 지난해 5월 오자와상은 산켄전기 본사 앞에서 책임있는 부서와의 면담을 요구하다 구속돼 연말에서야 보석으로 풀려났다. 코로나19 때문에 일본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이라 우리 모두 멀리서 마음만 졸였다.

일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오히려 우리보다 더 열심히 싸우는 일본의 ‘양심세력’이었다. 도쿄에서 새벽 3~4시에 일어나 전철을 서너 번 갈아타고 산켄전기 본사가 있는 사이타마현으로 오는 분들도 있었다. 처음엔 일본 기업 때문에 해고된 한국 노동자와 연대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고 했다. 노동자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는 우리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느끼게 됐고, 본인들이 되레 더 많이 배우는 것 같다고도 했다.

한국에서도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경남지방노동위원회가 회사의 정리해고를 부당해고라고 판정했다는 소식이었다. 2017년 5월엔 중앙노동위원회도 부당해고라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한일 간 연대와 노동위의 부당해고 판정에 부담을 느낀 회사는 결국 정리해고를 철회했다. 우리는 5월에 복직할 수 있었다.

공장으로 돌아왔지만 제대로 된 생산 설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납땜기 몇개가 있는 수공업 공장 같은 모습이었다. 일감이 많지 않아 부분 휴업을 반복했다. 생산 현장 관리자가 “생산하면 할수록 적자”라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불안감 때문에 노조는 “이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 아니냐. 새로운 아이템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회사는 제대로 투자를 확대하지 않았다.

정작 회사는 다른 곳에 투자했다. 일본 본사는 전류센서 생산업체 ‘이케이(옛 지흥)’에 투자했고, LG전자와 전기·전기공학 연구개발을 하는 합작법인을 만들었다.

결국 회사가 2018년부터 의도적으로 공장을 폐업하려고 준비를 해왔고, 코로나19로 일본 원정투쟁이 어려워진 틈을 타 2020년 7월 기습적으로 법인 청산을 결정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복직 뒤 임금인상 요구도 자제하며 열심히 일했는데 돌아온 건 두 번째 해고통지서였다.

금속노조 한국산연지회 조합원들이 2017년 6월 ‘정리해고 철회, 해고자 복직’ 합의를 이끌어낸 뒤 마산자유무역지역에 있는 공장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금속노조 한국산연지회 제공

금속노조 한국산연지회 조합원들이 2017년 6월 ‘정리해고 철회, 해고자 복직’ 합의를 이끌어낸 뒤 마산자유무역지역에 있는 공장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금속노조 한국산연지회 제공

회사는 예정대로 지난해 1월 법인 해산 등기를 마치고, 공장 부지도 매각했다. 공장 건물에 있던 ‘한국산켄주식회사’라는 간판도 사라졌다. 대신 ‘새로운 생각, 새로운 창조’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회사로 들어가는 1층 유리문에는 ‘서환전자’라는 생소한 회사 이름이 적혀 있다. 간판을 철거하던 날 뭔가 내 청춘이 담긴 회사를 뺏긴 것 같았다.

회사가 마지막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온 건 지난해 12월 10일이었다. 법인 청산등기를 마치고 남은 재산을 일본으로 보내기 전 마지막으로 위로금 제안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에 지친 동료 3명이 위로금을 받고 떠나갔다. 모두가 웃으면서 복직하면 좋겠지만 각자의 결정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12명이 남았다.

다시 시작된 한일 연대

일본 본사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부산지방고용노동청 창원지청은 지난해 말 일본 본사에 공문을 보냈다. “귀사가 현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한국산연지회와의 대화에 임할 의향이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오니 최종 입장을 회신해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하지만 일본 본사는 아직까지 답장 자체를 하지 않고 있다.

한국산연의 청산 소식을 전해 들은 일본 시민들은 또다시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섰다. 보석으로 풀려난 오자와상, 암투병 중이지만 연대를 해주는 미야우찌상, 코로나19 확진 뒤 회복해서 다시 나오고 있는 타하라상까지.

“위장폐업을 철회하라!” 이들은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산켄전기 본사 앞에서 나를 포함한 해고노동자 이름이 적힌 얼굴 모형을 들고 집회를 벌인다. 2020년 9월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100회를 넘어섰다. 한국 노동자들이 스카이프로 일본 현지와 연결해 발언하면 이를 일본 시민들이 일본어로 통역해준다. 코로나19 때문에 일본으로 오지 못한 해고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본사가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일본 시민들은 본사 앞 집회를 마무리하면 산켄전기 본사 주변 전철역 앞으로 가서 시민 선전전을 한다. 이후 이케부쿠로에 있는 산켄전기 영업점에 가서 항의 면담도 한다. 이들의 활동을 영상으로 지켜보고 많이 울었다. 이분들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너무 힘들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일본 시민들의 열정을 보면서 마음을 가다듬는다. “죽어서도 갚을 수 없는 은혜”라는 은형 언니 말에 공감이 간다.

금속노조 한국산연지회 조합원들이 지난 2월 9일 서울 마곡동 산켄코리아 앞에서 결의대회를 마친 뒤 현수막을 설치하고 있다. / 금속노조 제공

금속노조 한국산연지회 조합원들이 지난 2월 9일 서울 마곡동 산켄코리아 앞에서 결의대회를 마친 뒤 현수막을 설치하고 있다. / 금속노조 제공

일본에 갈 수 없는 우리는 한국에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월 9일 서울 강서구 산켄코리아 영업소 앞에도 천막을 쳤다. 창원 공장 앞에 이은 두 번째 천막이다. 동료들과 순번을 정해 창원과 서울을 오간다. 서울에 오면 2주간 지내면서 국회, 일본대사관, 여의도 LG전자 사옥 등지에서 시위를 한다. 가끔 단톡방에 반가운 소식도 올라온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힘내세요”라며 커피, 먹거리 등을 주고 갔다는 내용이다.

천막 앞 건물 4층엔 산켄코리아 영업소가 있다. 매주 월요일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사무실 유리문 옆에 있는 벨을 누른다. 매번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다. 문틈으로 교섭 요청서를 집어넣고 천막으로 돌아온다. 밤에는 ‘천막 지킴이’가 된다. 지금은 봄이 다가오면서 날이 풀렸지만 처음엔 입김이 보일 정도였다. 서러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 빵빵대는 차 소리, 겨울바람에 천막이 펄럭거리는 소리가 밤이 되면 더 뚜렷해졌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들어와 시비를 걸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도 됐지만 지금은 익숙해졌다.

왜 끝까지 싸우는가

폐업 뒤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최근 운전하다 파란불을 기다리던 중 이런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열심히 20년간 일해왔는데 해고자가 되고 나니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쓸모없는 사람인가. 다시 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해고당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일 거다.

주변에선 걱정을 많이 한다. 절에서 기도를 드리던 엄마는 아는 스님으로부터 복직이 어렵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을 한다. 아직 간호사 일을 하는 쌍둥이 동생은 내 소식을 접하고 “나만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너(언니)도 많이 힘들었구나”라며 공감을 표해줬다.

누가 건드리면 톡 터질 것같이 힘든 상황이라 사람들의 말이 상처로 다가오기도 한다. 폐업을 했고, 공장 부지까지 팔렸는데 어떻게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복직 가능성이 낮다는 거다.

이 싸움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최악의 상황엔 질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옳다’고 생각해 싸우는 거다. 폐업을 노동자 탓으로 돌리는 회사에 지고 싶지 않다. 동갑내기 혜민이는 “아이들에게 떳떳한 엄마”가 되고 싶어 버틴다고 했다. 일본 시민들의 아름다운 연대가 우리를 지탱해주는 힘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끼리만 했으면 이미 싸움을 정리했을지도 모른다.

요즘 내 일상을 둘러싼 노래는 모두 민중가요다. 하지만 남자친구가 수화기 너머에서 불러주는, 이적의 ‘다행이다’가 날카로워진 마음을 가끔 달래주기도 한다.

가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보곤 한다. 공장이 재가동되고 생산직 신규 채용도 되는 모습을 떠올린다. 내가 2001년 입사했을 때 언니들이 1997년 싸움을 들려줬듯이 나도 후배들에게 2016년, 2021년의 싸움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여긴 대단한 역사가 스며 있는 공장이라고….

※이 기사는 한국산연 해고노동자 백은주씨를 ‘화자’로 설정해 정리한 기사입니다.

<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