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발전의 위험성 일깨워준 우크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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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자포리자 원전, 의도치 않게 표적될 수도

핵전쟁과 기후변화, 군비경쟁으로 인류가 맞게 될 재앙을 경고하는 ‘지구종말시계(The Doomsday Clock)’가 자정까지 ‘100초’를 남겨두고 있다. 1947년부터 매년 미국 핵과학자회가 발표하는데 2020년 이래 3년째 인류 종말을 뜻하는 자정에 가장 근접한 상태다. 핵과학자회는 올해 1월 20일 지구종말시계를 설정하면서 우크라이나 주변에 러시아 군대가 주둔하면서 화약고가 된 상황을 위험요소의 하나로 꼽았다. 러시아가 지난 2월 2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이런 우려는 현실이 됐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에서 1986년 폭발사고가 난 4호기 위를 방사능 물질 누출을 막기 위한 강철관이 덮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에서 1986년 폭발사고가 난 4호기 위를 방사능 물질 누출을 막기 위한 강철관이 덮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러시아는 핵 위협 카드까지 꺼내들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2월 27일 핵무기 운용부대의 경계 태세 강화를 지시했다. 이어 3월 2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파괴적인 핵전쟁이 될 거라고 말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원전 시설을 점령한 것도 우려를 키우고 있다. 개전 초기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키예프)로 진격하면서 길목에 있는 체르노빌 원전을 점령했고 지난 3월 2일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전 주변 지역도 장악했다고 통보했다.

“평화적 핵시설 위협은 유엔 헌장 위반”

체르노빌 원전은 1986년 4호기가 폭발하면서 대량의 방사성 물질을 누출했다. 원전을 석관과 강철관으로 봉쇄했지만 여전히 다량의 방사성 물질이 있어 반경 30㎞ 지역에 일반인들은 출입할 수 없다. 자포리자 원전은 우크라이나에서 가동 중인 원자로 15기 중 6기를 보유한 가장 큰 원전이다. IAEA에 따르면 아직 원전 운영은 우크라이나의 통제하에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고, 방사선 수치도 정상 수준을 유지하는 중이다.

하지만 원전 주변 지역에서 무력으로 충돌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IAEA는 원전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모든 군사적 행동을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라파엘 그로시 사무총장은 3월 2일 발표한 성명에서 IAEA가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매우 면밀하게, 깊은 우려를 갖고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평화적 목적의 핵 시설을 향한 어떤 무력 공격이나 위협도 유엔 헌장과 국제법, IAEA 헌장을 위반하는 일”이라는 2009년 IAEA 총회 결정을 상기시켰다.

제임스 액턴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은 지난 2월 24일 재단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핵무기보다 원전에서 더 즉각적인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러시아가 원전시설에 고의적인 공격을 승인할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의도치 않은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원전 안에 우크라이나군이 있다고 생각해 현장 부대가 원전을 공격하지 말라는 상부의 명령을 위반해 공습을 요청할 수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인근 표적을 향한 무기가 항법시스템의 고장으로 원전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전력망을 공격하면 원전의 냉각수를 돌리는 펌프의 전원이 차단될 수 있다. 디젤 발전기와 같은 백업 전력을 이용할 수 있지만 공습으로 인한 화재 등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전쟁 상황에 소방관이 도착하기 어려울 수 있다.

1981년 이스라엘이 이라크의 핵무장을 저지하려고 건설 중이던 오시라크 원자로를 파괴한 적은 있지만 가동 중인 원전이 공격을 받은 사례는 없다. 하지만 9·11 테러로 원전이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일례로 체르노빌 사고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는 사고 25주년을 맞은 2011년 3월 핵과학자회 기고문에서 제2의 체르노빌 사고를 막기 위해 예방, 재생에너지, 투명성과 함께 테러리즘과 폭력에의 취약성이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체르노빌 사고는 기술적 결함과 인간의 실수로 인한 우발적 사고였지만 미래의 원전 사고는 고의적일 수 있다는 경고였다.

9·11 테러로 원전 설계 시 항공기를 이용한 고의 충돌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기준이 추가됐다. 미국에서 관련 규정을 도입한 후 국내에서도 2016년 관련 규정 법제화로 항공기 테러에 대응한 설계를 신고리 5·6호기에 처음 적용했다. 이에 따라 원자로 격납건물의 강화콘크리트 벽은 1.2m에서 1.37m로, 돔은 105㎝에서 120㎝로 두꺼워졌다. 보조 펌프 등 안전 설비가 있는 보조건물도 약 1.2m에서 1.8m로 강화됐다. 한국수력원자력 측은 “항공기 충돌 설계를 고려하지 않은 가동 원전에서는 항공기 충돌에 대비해 미국 가동원전 항공기 충돌 대응 전략인 NEI 06-12 규정을 준용한 평가를 수행해 대응방안을 수립하고 있으며, 현재 규제기관 인허가 심사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항공기 충돌에도 안전하다지만

항공기 충돌 외의 전쟁이나 사보타주 같은 의도적인 원전 파괴에 대응한 설계 기준은 없다. 원전의 안전성을 평가하는 한 방법인 확률론적안전성평가(PSA)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김숙현 원자력안전위원회 안전기준과 과장은 “원전의 안전계통이나 부품은 오랜 경험이 있어서 고장이 날 확률을 경험적으로 예측할 수 있고, 확률과 확률 간의 연계된 위험도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이나 테러와 같은 인간의 활동은 확률을 따질 수 없어 평가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의도적인 파괴 행위까지 대비하려면 발전소를 짓기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비용이 많이 든다는 현실적 문제도 있다.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도 규정(10CFR50.13·10CFR52.10)에서 “원전 면허 신청자에게 미국의 적인 외국 정부나 개인의 공격과 파괴적 행위로부터 원전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설계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조호현 원자력안전기술원 구조·부지평가실장은 “미국과 캐나다, IAEA의 규정을 보면 원전을 설계할 때 다른 나라의 공격에 대비할 필요는 없다고 나온다. 전쟁이나 테러는 발전소가 아니라 국가가 주요 시설 방어 차원에서 고민할 보안 문제로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쟁 확률을 합리적으로 따지긴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그 위험을 간과할 수도 없다. 작정하고 미사일을 쏠 때 과연 원전이 버텨낼 수 있을지 실제 실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미 공군이 주로 사용하는 2000파운드(약 907㎏) 무게의 폭탄을 맞으면 3~4m 두께의 콘크리트도 뚫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안위 측은 국내 원전은 항공기 충돌은 물론 미사일 피격 시에도 냉각계통에 문제가 생기는 수준으로까지 파괴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한빛4호기 격납건물에서 최대 깊이 157㎝의 공극(미세구멍) 140여개가 발견돼 횟수로 5년째 가동이 중단된 상황에서 안일한 태도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병섭 원자력안전과미래 소장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원전 폐기물 저장시설을 공격해 방사능 오염 가능성까지 제기되는 상황에서 원전시설에 대한 테러와 전쟁 위험을 공식적으로 평가할 시점이 됐다”면서 “한빛4호기처럼 원전 내부의 부실시공 문제마저 나온다면 외부 공격으로부터의 안전 확보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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