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안 보이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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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간 <가족오락관>이라는 프로그램을 이끌어온 ‘국민 MC’ 허참씨(본명 이상용)가 73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습니다. 지상파 프로그램으로는 마지막 출연이었던 <불후의 명곡>에서 그가 부른 ‘편지’를 스치듯 들었던 터라 마음이 더 먹먹했습니다.

[편집실에서]‘어른’이 안 보이는 시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73세였습니다. 한 지붕 밑에서 살던 가족 중에서 처음 맞닥뜨린 ‘죽음’이었습니다. 73이라는 숫자가 뇌리에 깊이 박혔습니다. 모든 어른이 다 73세가 되면 곁을 떠나갈 줄 알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평균수명의 증가, 의학 기술의 발달 등으로 ‘100세 시대’를 입에 달고 사는 세상이 왔습니다. “사회가 활력을 잃어간다”는 우려가 따라붙었습니다. “정작 존경할 만한 어른들은 잘 안 보인다”는 말도 심심찮게 나옵니다. 고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을 떠올립니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열기가 뜨겁던 시절, 민주투사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그를 향해서도 일군의 사람들이 거친 비판을 쏟아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2000년대 초중반 무렵이었습니다. “(나이를 먹으니) 판단력이 예전 같지 않다”, “오래 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는 비아냥마저 나왔더랬습니다. 시대의 어른으로 추앙받던 분조차 세간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걸 보며 ‘한국적 토양’에서 어른이 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절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김형석 교수처럼 100세를 넘어서도 변하지 않는 지적 능력과 통찰력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어른들도 있지만,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인사들 대부분이 특정 진영의 볼모로 전락해 볼썽사나운 장면을 연출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지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지금처럼 나라 전체가 철저하게 반으로 나뉘어 상대 진영을 향해 적개심을 드러내는 사회에서 아예 말문을 닫고 초야에 파묻혀 살거나 어지간한 ‘포커페이스’가 아니라면 반대편 인사들의 손가락질을 피해갈 도리가 없겠지요. 제아무리 훌륭한 인품과 도덕성, 식견을 갖춘 인물이라 하더라도 이런 구조라면 하늘이 두쪽 나도 전 국민의 우러름을 받기는 어렵습니다. 대한민국의 판세를 한번 볼까요. ‘여론조사 결과’ ‘당선 가능성’ ‘현실성’ 등 다양한 용어를 동원해가며 “내 편, 네 편 중 어느 한쪽에 서라”고 강요하는 마수에서 대한민국 유권자들은 좀처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대선의 막판 최대변수가 ‘단일화’일 정도이니 다당제의 꿈은 요원하고 정치적 상상력도 빈약하기 그지없습니다. 주위를 둘러봐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대마가 세계라는 거대한 바둑판을 쥐락펴락합니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불거진 ‘반중정서’와 ‘혐한론’ 등도 강대국들의 역학관계라는 국제정세와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는 없겠지요.

발을 동동 구르며 열띤 승부를 펼치다가도 “몇 대 몇?”이라는 사회자의 외침과 함께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다음 회를 기약하던 <가족오락관> 출연자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은 단지 TV 브라운관 속에서나 가능한 걸까요?

<권재현 편집장 jaynew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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