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소비용 무서워 공익소송하려 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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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소 가능성은 낮은데… 재판 지면 소송비용까지 부담

“소송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 민사·행정소송 판결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문구다. 소송에서 패한 사람은 승리한 상대방의 소송비용까지 물어야 한다. 민사소송법 제98조에 근거한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지난 1월 3일 서울 지하철 광화문역에서 기획재정부에 ‘장애인 권리 예산’ 반영 등을 촉구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지난 1월 3일 서울 지하철 광화문역에서 기획재정부에 ‘장애인 권리 예산’ 반영 등을 촉구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소송비용은 재판 비용(인지액·송달료 등)과 당사자 비용으로 나눈다. 대개 당사자 비용에 속하는 변호사 보수가 소송비용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패소했다고 상대방 변호사 보수를 다 물어줘야 하는 건 아니다. 소송가액에 따른 일정 비율만 변호사 보수로 인정한다. 청구금액이 5000만원인 소송이라면 상대방에게 지급해야 할 변호사 보수는 440만원이다.

1990년 이전에는 원고·피고는 승패와 무관하게 자신들의 변호사 보수를 알아서 부담했다. 1990년 법 개정으로 변호사 보수도 소송비용에 산입했다. 이로써 패소했을 때 비용부담이 크게 늘어났다. 남소(소송의 남발) 방지 차원이었다. 문제는 패소자부담원칙을 공익소송에도 예외없이 적용한다는 점이다.

패소자부담원칙의 맹점

지체장애 1급 A씨는 2017년 5월 서울지하철 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열차에 탑승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열차와 승강장의 높이 차이(단차)가 컸다. A씨는 전동휠체어를 후진한 뒤 다시 전진하는 방식으로 승차를 시도했다. 휠체어는 큰 단차 때문에 열차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A씨만 열차 안으로 튕겨 나갔다. A씨는 업무를 보기 위해 명동역에 갈 때도 먼 길을 돌아갔다. 3호선 충무로역은 승강장과 열차 간격이 넓어 사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을지로역에서 내려 휠체어를 타고 명동역까지 이동해야 했다. 지체장애 1급 B씨도 2019년 4월 2호선 신촌역에서 하차하던 중 전동휠체어 앞바퀴가 승강장과 열차 사이에 끼었다. 안전벨트 덕분에 바닥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트라우마로 해당 승강장을 이용하지는 못하고 있다.

A씨와 B씨는 장애인차별금지법에 근거해 서울교통공사를 상대로 한 차별구제 등 청구 소송을 법원에 제기했다. 1·2심 모두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A·B씨는 지난해 12월 법원의 결정에 따라 서울교통공사에 변호사 보수 등 소송비용 1000만원 남짓을 지급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서울교통공사는 강제집행을 예고했다. A씨 등은 대법원에 상고하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최종 판결을 낙관하기 어려워 포기했다. 대법원에서도 패하면 상대에게 줘야 할 소송비용이 더 늘어난다는 점도 고려했다.

이들을 대리한 조미연 공익인권법재단 변호사는 “A·B씨는 전체 교통 약자를 대표해 차별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고자 소송을 냈다”며 “사회적 약자들에게 변호사 보수까지 상환토록 한다면 누구도 패소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거대 공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A·B씨의 사례는 현행 패소자부담원칙의 맹점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예외 없는 패소자부담원칙 적용은 헌법상 기본권인 재판청구권을 제약한다. 대한변호사협회 ‘공익소송 패소자부담제도 개선’ TF 위원을 지낸 박호균 변호사는 “공권력의 피해자 등 약자는 재판을 통해 국가와 싸울 수 있는 것”이라며 “재판청구권은 다른 기본권을 뒷받침하는 권리이므로 재판청구권이 없다면 다른 권리들도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공익소송은 특성상 출발선에서부터 원고에게 불리하다. 장애인 차별, 정보공개, 소비자보호, 노동관계, 환경보호, 의료사고 등이 공익소송 대상이다. 우선 두 당사자의 지위가 대등하지 않다. 소송을 제기하는 쪽은 사회적 약자나 시민사회 단체이고, 상대는 국가·공공기관·지방자치단체 또는 대기업 등 힘 있거나 전문성을 갖춘 집단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공익소송은 기존 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도하는 사건’이 많다. 패소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시민사회가 일률적인 패소자부담원칙을 공익소송의 최대 걸림돌로 지목하는 이유다. 이지은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간사는 “공익소송에서 승소해 제도를 개선하면 그 이익은 모든 시민에게 돌아가지만, 패소하면 개인이나 단체가 책임을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 소장인 이상희 변호사는 공익소송의 필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장애인의 이동권은 지금 당연한 권리가 됐다. 이걸 ‘권리화’하려고 법원 소송 등 수많은 투쟁이 있었다. 패소자부담제도에 예외를 두지 않으면 사회에 큰 손실이다.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도록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승소하면 소송비용 받고 패소하면 면제

대안으로 ‘편면적 패소자부담’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공익소송을 제기한 원고가 승소하면 피고로부터 소송비용을 받는다. 이에 더해 원고가 패소해도 소송비용을 피고에게 주지 않아도 되는 방식이다. 지금보다 공익소송을 더 장려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민사소송법을 개정해야 한다. 패소자부담원칙의 예외 유형을 담은 조항을 신설하는 방법이다. 대한변호사협회는 다음 두가지 경우를 예외로 두자고 제시했다. ‘인권 보호와 향상, 국민의 안전, 환경, 소비자의 이익, 공정한 경쟁 등에 관한 소송으로 그 성격상 공익성이 인정되는 경우’, ‘소송 당사자의 사회적 지위 및 경제적 자력, 소송의 성격 경위 등을 고려할 때 패소한 당사자에게 상대방의 소송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것이 재판청구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거나 정의와 공평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 등이다.

나아가 구체적인 사건 종류를 대법원 규칙으로 정하자는 의견도 있다. 박호균 변호사는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공익소송 개념이 넓어지거나 좁아질 수도 있다”라며 “상황에 맞게 법원이 판단하도록 대법원 규칙에 세부적인 사항을 위임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양정숙 의원(무소속)이 지난해 4월 같은 취지로 발의한 민사소송법 개정안도 눈길을 끈다. 양 의원은 공익신고자보호법에서 규정하는 ‘공익침해 행위’와 관련한 사건을 공익소송으로 정의토록 했다. 공익성 개념이 모호하다는 지적을 보완하기 위해서다. 대법원 규칙에서도 추가로 공익사건을 규정토록 했다.

차선책으로 국가소송법을 개정해 국가 상대 소송만이라도 편면적 패소자부담원칙을 도입하는 방안도 거론한다. 법무부의 법무·검찰개혁위원회가 2020년 2월 이런 내용을 비롯해 민사소송법 개정 추진을 법무부에 권고했다.

해외 사례를 보면 미국은 원칙적으로 변호사 보수를 각자 부담한다. 다만 인권, 소비자보호, 고용관계, 환경보호 등 공익소송에서는 편면적 패소자부담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일본은 아예 변호사 보수를 각자 부담토록 한다. 영국은 공익소송에서 ‘보호적 비용 명령’을 통해 소송비용 지불 의무를 면제하거나 상한을 설정한다.

법무부와 대법원에 입장을 물었다. 법무부는 공익소송의 구체적인 범위와 요건, 감면 결정의 주체(법원·국가기관) 등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민적·사회적 공감대, 남소 우려, 공정성 담보 필요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관계기관 협의를 추진 중이라고 덧붙였다.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취지는 공감하지만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공익소송의 개념이 모호한 점, 형평성 원칙에 반한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남소 우려도 언급했다. 현재도 ‘현저히 부당한 경우’에는 법관 재량으로 감액이 가능하다고도 했다. 사실상 반대 의견이다.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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