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의 얼굴, 우표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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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사업본부는 올해 총 26건의 기념우표 발행을 계획하고 있다. 그중 첫 번째 우표가 지난 2월 7일 나왔다. 주제는 조선왕실의 어진(왕의 초상화)이다. 2종의 우표에 어진박물관이 보관 중인 조선 태조 어진(국보)과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조선 영조의 어진(보물)을 담았다. 우표전지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병풍 그림 ‘일월오봉도’를 넣었다.

조선 왕의 초상화 ‘어진’을 주제로 한 기념우표 / 우정사업본부 제공

조선 왕의 초상화 ‘어진’을 주제로 한 기념우표 / 우정사업본부 제공

어진은 조선시대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는 대표적 상징물이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왕권의 정통성을 상징했다. 조선 국왕들은 정치적으로 위기해 처할 때마다 태조 어진을 새로 제작하고 진전에 봉안했다. 이 전통이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수많은 어진을 제작했지만, 남아 있는 건 매우 드물다. 조선 전기 어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고, 후기 어진은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 보관하던 중 불타거나 훼손되고 말았다. 현재 어진으로 얼굴을 알 수 있는 조선 왕은 이번에 우표에 담은 태조와 영조 그리고 철종 3명뿐이다.

왕의 모습을 함부로 형상화하는 것은 조선에서 엄격하게 금지했다. 어진은 국왕의 명에 따라 엄격한 절차와 형식을 거쳐 제작했다. 어진 제작 방식은 도사, 추사, 모사로 구분한다. 도사는 살아 있는 국왕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리는 것이다. 추사는 왕의 얼굴을 아는 이들의 기억에 의존해 그린다. 모사는 기존 어진을 바탕으로 또 한 본의 어진을 제작하는 방식이다. 왕이 살아 있다면 왕의 마음에 들 때까지 여러 번 초본 작업을 했다. 초본을 완성하면 그 위에 비단 천을 겹쳐 놓고 비단 위에 비친 형상을 따라 그렸다. 채색 작업까지 끝나면 초상화에 종이와 비단을 발라 두껍게 만들고 위아래에 축을 달아 족자로 꾸몄다.

영조는 어진 제작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경향신문에 연재 중인 우리 문화재 이야기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를 보면, 영조는 자신의 어진을 모아 두고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는 ‘품평회’를 연 적도 있다. 어느 날 영조는 자신의 40세 때와 51세 때 제작한 어진을 한데 가져오라 하고는 신하들에게 그간의 변화를 얘기해보라고 했다. 기록을 보면 신하들은 입에 발린 말을 하지 않고 “옛날 모습과 많이 다릅니다”(장득만), “수염과 머리카락은 물론 성상(성인이나 임금의 초상)의 안색도 옛날 어진의 모습과 다릅니다”(조현명)라고 직언했다고 한다.

지금의 영조 어진은 1744년에 51세 때 모습을 그린 걸 1900년대 화가들이 베껴 그린 것이다. 안타깝게도 원본은 소실되고 없다. 향년 83세로 조선 왕 가운데 가장 장수한 영조는 평소 건강에 관심이 많았다. 하루 다섯 번이던 식사를 세 번으로 줄이고 채식 위주로 식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재위 52년 동안 내의원에서 7284회나 진찰을 받을 정도로 건강 진단도 철저히 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문화재청 소식지에 기고한 글에서 “(영조의 어진은) 왕세제 시절의 초상화와 비교를 해도 30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체형 변화가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라며 검소하게 입고 먹는 것이 자신의 건강 비결이라고 직접 언급할 만큼 관리에 철저했던 그가 중년 이후에도 ‘건강하고 의욕적인 모습’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최미랑 뉴콘텐츠팀 기자 r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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