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기는 자들의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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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는 MZ세대 선수들

‘세대 차이’는 인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있었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에는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어”라는 글귀가 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요즘 애들이 버릇이 없고 윗사람을 무시한다”고 했다.

사진 위부터 이상호(스노보드), 김민석(스피드스케이팅), 차준환(피겨스케이팅) 선수 / 연합뉴스

사진 위부터 이상호(스노보드), 김민석(스피드스케이팅), 차준환(피겨스케이팅) 선수 / 연합뉴스

세대 차이는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최근 우리 사회는 ‘MZ세대’라는 말을 쓴다. 198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태어난 밀레니얼세대와 Z세대를 묶어 칭하는 말이다.

“요즘은 옛날과 다르다”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도 세대 차이가 드러났다. 올림픽 경험이 있는 굵직한 선수들은 “요즘은 옛날과 다르다”고 입을 모은다.

부정적 의미의 ‘다르다’가 아니다. 과거에는 스포츠대회에서 결과만 중시하는 성적지상주의가 팽배했다면 이제는 결과보다 과정 자체를 즐긴다. 예전에는 젊은 선수들에게 ‘패기’를 강요했지만 이번 대표팀에 참가한 젊은 세대는 자신에게 더 집중하려 노력한다.

지난해 여름에 열린 2020 도쿄올림픽 때는 경기를 지켜보는 이들도 승패를 떠나 과정에 열광했다. 성적은 썩 좋지 않았다. 한국은 금메달 6개, 은메달 4개, 동메달 10개를 따 종합순위 16위에 그쳤다. 목표로 잡은 톱 10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인데다 1984년의 LA올림픽 이후 가장 저조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한반도는 올림픽 기간 내내 열광의 도가니였다. 메달을 따진 못했지만 4강 진출의 쾌거를 이룬 여자배구대표팀을 향해 환호했고 가능성을 보인 한국 수영 유망주 황선우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탁구 신유빈, 높이뛰기 우상혁 등도 ‘라이징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도쿄에서 베이징으로 바통을 이어받은 대표팀 선수들도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반드시 메달을 획득하겠다’라는 마음보다 ‘내가 스스로 만족할 만큼 후회없이 노력했는가’ 여부에 더 의미를 부여한다.

지난 2월 8일 한국에 첫 메달을 안긴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 김민석(23·성남시청)도 그랬다.

스피드스케이팅 첫 종목에 출전한 김민석은 다소 불리한 환경에서 경기를 치렀다. 김민석에 앞서 10조에서 뛴 토마스 크롤(네덜란드)이 1분43초55의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다.

다음 조인 11조의 김민석은 네덜란드의 키엘드 나위스와 함께 뛰었다. 나위스는 이 종목 세계기록 보유자(1분40초17)이자 평창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다. 나위스는 초반부터 김민석과 거리를 벌리며 치고 나갔고 1분43초21로 크롤의 신기록을 바로 갈아치웠다.

올림픽 신기록을 낸 크롤, 지난 대회 금메달리스트 출신의 나위스 등과 차례로 마주한 김민석은 자칫하면 페이스가 흐트러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김민석은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의 뒤에 8명이나 남아 있었지만 초조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과정’에 전력을 쏟았기 때문이다.

김민석은 경기 후 “‘될 대로 되라지’ 생각을 했다. 난 내 것을 했으니까 주어진 운명에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동메달을 품에 안았다.

‘과정’에 전력 쏟는다 피겨스케이팅에서도 ‘과정’을 중시한 또 한명의 선수가 있었다. 차준환(21·고려대)은 지난 2월 10일에 끝난 피겨 남자 싱글에서 최종 총점 282.38점으로 전체 5위에 올랐다. 한국 선수가 올림픽 피겨에서 5위 내에 이름을 올린 건 김연아 이후 처음이다. 또한 4년 전 자신이 기록한 한국 남자 싱글 올림픽 최고 순위(15위)도 훌쩍 경신했다. 지난달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스케이팅 4대륙선수권대회에서 본인이 세운 한국 남자 싱글 공인 최고점(273.22점)도 넘어섰다.

차준환은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어떠한 수치도 목표로 잡지 않았다. 그는 “선수로서 좋은 목표를 바라보는 건 맞다. 하지만 나의 과정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했다.

두 번째 올림픽을 마친 차준환은 “이번 올림픽의 최대 목표는 개인 최고점을 기록하는 것과 ‘톱 10’ 안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이상으로 톱 5까지 나오게 됐다”며 “이번 올림픽에서는 나라는 선수를 좀더 보여줬다. 계속 싸우고 발전하면서 성장하고 싶다”는 다짐을 밝혔다.

과정에 최선을 다했으니 메달을 못 땄다고 좌절할 이유도 없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평행대회전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배추보이’ 이상호(27·하이원)는 이번 대회의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준준결승에서 0.01초 차이로 아깝게 탈락하고 말았다. 예선에서는 줄곧 1위를 지켜왔기에 더 아쉬운 결과였다.

이상호는 경기를 마친 뒤 얼굴을 감쌌지만 이내 덤덤하게 결과를 받아들였다. 그는 “내가 목표로 잡았고 많은 분들이 기대했던 금메달이라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해 아쉽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큰 목표로 삼았던 것은 성적이 어떻든 간에 후회가 남지 않는 경기를 하고 싶었다. 결과는 아쉽게 됐지만 후회없이 경기하는 건 다 이뤄 후련하다”고 했다.

평창올림픽 후 부상과 수술, 재활 과정 등을 거쳐 다시 출전한 올림픽이었기에 자신이 더 대견스럽다고 했다. 이상호는 “많은 관심이 부담스럽기도 해 멘털 관리가 힘들었는데, 그래도 잘 관리했고 많은 응원으로 힘도 냈다. 나 자신에게 고생했다고 하고 싶다”고 말했다.

“편안하게 즐기고 싶어요” 어찌보면 이런 마음가짐이야말로 정답일지 모른다. 2010 밴쿠버올림픽부터 2022 베이징올림픽까지 4번 연속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이승훈(34·IHQ)은 이제야 스케이트를 즐기기 시작했다.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 ‘맏형’인 그는 “이번 대회에서는 남기고 싶은 것도 딱히 없다. 앞으로 편안하게 즐기면서 가고 싶다. 스케이트를 타는 것 자체가 너무 재미있다. 그런 거로 만족하면서 성적에 목매지 않고 하면 될 것 같다”고 했다. 올림픽 3번, 4번을 거치고 나서야 얻은 깨달음을 대표팀의 젊은 선수들은 이미 알고 실천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번 대회 개막을 앞두고 나온 전망은 썩 좋지 않았다. 코로나19로 훈련량이나 실전 경기 경험이 부족했고 ‘효자 종목’인 쇼트트랙에서는 심석희 욕설 논란으로 내홍을 겪기도 했다. 대한체육회는 금메달 1~2개와 종합순위 15위를 목표로 내걸었다. 대회 개막 후 5일 동안 단 1개의 동메달만 따내는 데 그친 한국은 쇼트트랙의 간판 황대헌(23·강원도청)이 2월 9일 첫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분위기 반전에 시동을 걸었다.

많은 메달을 따면 좋겠지만 올림픽을 지켜보는 이들이 더 관심을 갖는 건 선수들의 면면이다. 결과만 보고 박수치지 않는다. 그 길을 걸어온 과정 자체에 열광하고, 기뻐한다. ‘전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라는 수식어에 잘 어울리는 마음가짐이다.

<베이징 | 김하진 스포츠부 기자 h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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