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3와 낭만적이고 극단적인 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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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은 탄생부터 분산적이고 개방적이었다. 그 이상에 매혹돼 모두가 인터넷에 열광했다. 새로운 유형의 민주주의를 가져올 것이라고도 기대했다. 집중화된 권력의 개인을 향한 분산, 누구나 참여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참여와 개방성. 인터넷을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담지하는 메시아 같은 존재로 인식했다. 존 페리 바를로 같은 사이버 자유주의자들은 “당신들의 정부가 이전에 만든 세계보다 더 인간적이고 공정하기를”이라며 인터넷의 무한가능성을 찬양하기까지 했다.

NFT가 적힌 스크린 앞에 금으로 도금된 암호화폐 코인이 전시되어 있다. / AFP연합뉴스

NFT가 적힌 스크린 앞에 금으로 도금된 암호화폐 코인이 전시되어 있다. / AFP연합뉴스

인터넷은 그들의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웹1.0(개인 웹페이지의 시대)을 거쳐 웹2.0(소셜미디어의 시대)으로 나아갔음에도 권력을 나눈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았다. 페이스북과 같은 독점 권력이, 유튜브와 같은 허위조작정보의 온상이 인터넷을 뒤덮어버렸다. 개인이 쟁취한 권능은 인터넷을 타고 음모론과 인종차별, 혐오를 퍼뜨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어떻게 인터넷을 수리해야 할지 몰라 전 세계가 신음하고 있을 정도다. 웹3는 대안의 담론으로 등장했다. 다시 분산에 주목하고 표현의 자유와 개인들의 자기통제권을 이야기한다. 독점 권력의 해체를 강조하고 데이터의 자기소유권을 말한다.

고장 난 인터넷을 고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려는 그들의 의도는 선하다. 하지만 이들은 웹의 과거를 성찰하지 않는다. 더 많은 자유를 부여했을 때 발생하는 통제 불가의 위험을 언급하지 않는다. 개인들이 진정 분산을 원하는지조차 증명하지 않는다. 암호화 메신저 시그널의 창업자 목시 말린스파이크조차 “사람들은 자신의 (분산된) 서버를 운영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전망한다.

웹3 찬양론자들은 자유의 이상적인 상태만을 반복적으로 선언한다. 더 극단적인 자유만이 인터넷을 구원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 ‘표현의 자유 절대주의자’라는 별칭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들은 자유 절대주의가 불러온 부작용과 위험에 눈을 감는다. 대표적으로 ‘조지 플로이드 NFT’ 사건을 들 수 있다. 웹3를 대표하는 NFT(대체불가능토큰) 마켓플레이스 ‘오픈씨’에 최근 인종차별로 희생된 조지 플로이드를 조롱하는 삽화가 등록돼 경매에 부쳐졌다. 비록 큰돈이 모이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 하나만으로도 웹3가 불러올 미래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메타버스에서 벌어지는 각종 성희롱과 성추행은 굳이 더 말할 것도 없다.

극단적인 표현의 자유에 변조와 삭제가 불가능한 블록체인이 결합한다면 앞으로 어떤 위험이 닥칠지 상상만으로도 암울하다. 온갖 혐오와 차별, 성적인 부산물들이 자유와 분산의 이름으로 단단한 블록과 해시에 갇혀 인터넷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면 ‘잊힐 권리’ 따위는 설 자리를 잃고 말 것이다. “대부분의 크립토 공간이나 결과적으로는 NFT조차 한갓 쓰레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라는 비난이 벌써부터 나오는 이유다.

고장 난 인터넷은 아직 수리되지 않았다. 스스로 정화될 것이라는 웹의 자율주의 신화는 깨진 지 오래다. 웹1.0조차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지금, 웹3라는 환영이 다시 돌아다니고 있다. 웹3라는 진부한 상상을 시작하기 전에 ‘기대-실망’의 사이클을 반복해온 인터넷의 과거에서 교훈을 얻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싶다.

<이성규 미디어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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