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핫한 회귀물, 롱런 비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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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던 주인공 앞에 갑자기 자신이 친딸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나타난다. 심지어 이 가짜 딸 때문에 주인공이 가짜로 낙인찍혀 꽁꽁 묶인 채 단두대에 오른다. 목이 떨어지기 직전 가짜 딸에게서 “사실은 네가 진짜였단다”라는 속삭임을 듣고 처형을 당한다. 그 순간, 느닷없이 주인공은 가짜가 나타나기 전의 시점으로 회귀한다.(<사실은 내가 진짜였다>)

삼월, 유운 작가의 웹소설 원작 회귀물 웹툰 <사실은 내가 진짜였다> 중 주인공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장면 / 카카오페이지

삼월, 유운 작가의 웹소설 원작 회귀물 웹툰 <사실은 내가 진짜였다> 중 주인공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장면 / 카카오페이지

지지리도 운이 없이 불행하게 살던 외과의사.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려 개업한 병원까지 망하고 만다. 부인과 이혼하고, 말기암 선고까지 받은 그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갑자기 한 선녀를 만나 과거로 회귀한다. 전생을 살며 갖고 있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회귀 이후 두 번째 삶은 승승장구를 거듭한다. 그런 그의 앞에도 새로운 위기가 닥쳐온다.(<메디컬 환생>)
주인공은 한국의 평범한 대학생이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 속 백작 가문의 영애로 빙의해버린다. 귀족의 삶을 즐기려고 파티에서 술에 진탕 취한 그는 그만 남주인공과 하룻밤을 보내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남주인공은 “남녀가 첫날밤을 치렀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한다.(<남주의 첫날밤을 가져버렸다>)

수년째 식지 않는 인기 ‘회귀물’ 웹툰·웹소설의 인기가 수년째 식지 않고 있다. 특정한 장르가 크게 주목받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새로운 유행에 자리를 넘기던 그간의 흐름이 무색할 정도다. 제목과 간략한 시놉시스만 봐도 솔깃해지는 매력적인 작품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어서다. 그렇다고 이야기의 형태를 그대로 둔 채 자가복제만 되풀이하는 건 아니다. 갑자기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가는 ‘회귀’라는 기본 요소에, 느닷없이 다른 인물이 되어 한동안 새로운 삶을 사는 ‘빙의’, 아예 새롭게 태어나는 ‘환생’까지, 기본 골격은 유지하되 다양하게 변주된 요소들이 한데 어울리면서 ‘회·빙·환’이라는 용어까지 자리 잡았다. 최근에는 한 번의 회귀에 그치지 않고 여러 번 회귀하는 ‘루프’ 요소를 넣은 작품들도 강세를 보인다.

대중의 빠른 반응을 얻으려고 통속적인 소재에 의존하면서 하위문화 평가를 받던 분야에서 ‘회·빙·환’의 인기는 문화 콘텐츠 분야에서 웹툰과 웹소설이 고유한 장르적 특성을 구축했다는 의미여서 눈길을 끈다. 특히 웹소설에서는 ‘회귀’가 하나의 클리셰를 넘어 대부분의 작품을 아우르는 공통요소로 자리 잡았다. 작가로서는 주인공이 어떻게 탁월한 능력을 갖게 됐는지 일일이 설명하거나 설정해둘 필요가 없으니 편하다. 독자들도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는 현상을 당연한 기본전제처럼 받아들인다. 강상준 대중문화평론가는 “회귀물은 이제 하나의 장르라고 하기도 뭐할 정도로 독자들 뇌리에 웹소설의 특징으로 각인된 상태”라고 말했다.

여느 클리셰처럼 판에 박힌 진부한 느낌을 줄 법도 하지만 이를 넘어선다. 강 평론가는 “회귀라는 요소가 웹소설이나 웹툰을 안 보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해서 오히려 드라마 같은 다른 영역에서 새롭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흔히 ‘이(異)세계 판타지’라 부르는 일본 특유의 소환물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한국만의 특색 역시 ‘회·빙·환’의 인기가 한동안 더 이어지리라 내다보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웹툰·웹소설로 회귀물을 감상한 경험이 적을수록 색다르게 느낀다는 분석이다.

작품 재창작 비율 높아 해당 분야와 장르의 팬을 자처하는 독자들은 익숙할 정도로 굳어진 회귀물의 여러 요소에 더 열광한다. 만화평론가인 박인하 서울웹툰아카데미 이사장은 “디지털 콘텐츠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 열성 팬들은 취향에 맞는 분야를 고집하며 그 안에서 예측가능한 재미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며 “여러 세분화된 장르 중 익숙한 장르의 작품을 중심으로 반복해서 감상하는 이른바 해시태그형 소비가 단적인 예”라고 말했다. 이렇게 장르 안에서 굳어진 문법을 선호하는 독자들이 늘면서 안정적으로 확대된 시장의 수요에 맞게 작품을 공급하는 작가들도 많아졌다. 더 많은 작가가 경쟁에 가세하면서 각기 개성 있는 매력의 작품들이 한판 승부를 펼치는 선순환이 이뤄지는 셈이다.

여기엔 콘텐츠 산업 안팎을 둘러싼 환경적인 요인의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다. 웹툰과 웹소설은 서로 융합해 손쉽게 다른 분야의 작품으로 재창작하기 쉽다. 실제로 회귀물 웹툰은 원작 웹소설의 인기를 바탕으로 재창작하는 비율이 높다. 박 이사장은 “작품의 즉각적인 소비가 특징인 이 시장에서 웹툰과 웹소설은 많은 유사성을 공유하며 ‘노블 코믹스’를 정착시켰다”고 말했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도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헤르미온느가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쓰며 공부하는 장면이 나왔듯 이런 ‘타임슬립’ 요소는 대중적으로도 익숙하다”며 “디지털 기술 환경의 변화로 사람들의 인지체계 또한 마치 꿈만 같던 일들을 점차 가능하다고 받아들이게 되면서, 그 상상력을 콘텐츠 분야에서 구체화한 작품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웹소설 작가들의 고민은… 회귀물의 인기를 이끌어가는 웹툰과 웹소설 분야가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지점도 있다. 작품의 인기로 대중과의 접점을 늘이며 유명세를 누리는 웹툰 작가와 달리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웹소설 작가는 드물다. 웹툰 작가는 일단 유명 플랫폼에 작품을 연재하는 것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고료를 받는다. 작품만 써서 안정적인 소득을 거두기 어렵다 보니 다른 생업을 병행하는 대부분의 웹소설 작가들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한 콘텐츠 플랫폼 업체 관계자는 “국내 웹소설 작가들은 대체로 플랫폼과 논의를 거쳐 상업적인 인기에 중점을 둔 작품을 기획하는 경우가 많아 개인을 전면에 내세우려는 요구가 크지 않은 편”이라고 말했다. 회귀물을 중심으로 콘텐츠시장을 확대하는 데 일조해온 현직 웹소설 작가들이 그만한 보상을 받고 있는지 의문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웹소설 작가는 “작가들이 노출을 꺼리는 건 작품활동으로 얻는 수익만으로는 모자라 ‘투잡’을 뛰기 때문”이라며 “플랫폼의 역할을 낮춰 보는 건 아니지만 한편에 100원 하는 작품을 팔아 손에 겨우 30원 정도 쥐는 구조로 작업 환경 개선을 기대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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