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현동-박제된 시간 속 우리네 추억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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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골목을 통해 풍부한 표정과 삶의 방식을 드러낸다. 서울 북아현동 골목길은 드물게 옛 골목의 흔적이 숨어 있다. 서울지하철 2호선 아현역을 나서면 남쪽과 북쪽 모두 새로 지은 아파트촌이 보인다. 아현동 남쪽 골목은 지도에서 흔적조차 없고, 북쪽 북아현동 골목길도 반은 뭉개졌다. 겨우 남은 반마저 언제까지 행인이 오가는 골목으로 존재할지 기약이 없다. 풍요로운 골목의 표정을 보고 싶다면 지금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북아현동은 골목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북아현동은 골목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북아현동은 아현 고개의 북쪽에 깃들어 있다. 충정로에서 마포 쪽으로 빠지는 길목에 안산에서 길게 뻗은 고갯길이 애오개인데, 한자로 아현(阿峴)이라 불렀다. 생김새가 아이처럼 작다는 뜻에서 아이 고개(兒峴) 또는 작은 고개라고 했으며, 지하철 5호선 애오개역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북아현동의 동과 서는 확연히 달라졌다. 마치 다른 행성의 모습이라도 되는 듯 안산에서 뻗어 내린 길을 따라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분명히 나누고 있다. 이제 막 지어 첨단의 편리를 보이는 뉴타운 아파트단지와 아마도 조선시대부터 쌓인 시간의 단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옛 골목의 영역이 서로 분단된 모습이다. 철책은 없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형식은 너무나 다르고 낯선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오래된 삶의 형식 유지

북아현동 동쪽 옛 골목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오래된 삶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골목 어귀 잉어빵을 파는 노점에 노년의 손님이 목청 높여 열변을 토하고 있다. “요즘 병든 사람들이 많은 것은 백신 때문이다. 백신 맞으면 온갖 병에 걸린다”는 그의 강변에 장사하는 이는 건성건성 고개를 흔들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아마도 여러 번 반복되는 일상인 듯 주변 과일 장수마저 멀리 눈길을 돌린다. 이 또한 코로나19 팬데믹이 가져온 반갑잖은 일상이다. 강 건너 불구경을 하던 과일집 주인은 “요즘 날이 추워 병이 도진 사람들이 많다. 저 사람 빼고는 다 백신 맞았을 것”이라며 혀를 찼다.

북아현동 주택가를 관통해 경의선 철길이 지나간다.

북아현동 주택가를 관통해 경의선 철길이 지나간다.

북아현동 비탈진 마을을 올라가는 골목 초입엔 한눈에 봐도 세월의 연륜과 관록을 알 수 있는 식당과 가게들이 눈에 띈다. 옛날식 통닭집과 안주가 푸짐한 술집은 간판만 봐도 1970년대 어느 시점을 겨냥하고 있었다. 동네 주민들만 알 듯 숨어 있었지만 잘 꾸민 카페도 향기를 풍기며 자신을 과시한다. 예나 지금이나 메뉴판이 바뀔 일 없는 분식집도 정겹다. 요즘 골목길에서 보기 드문 동네 이불가게 주인은 바닥에 두껍게 깔아둔 이불에 발을 뻗고 손님과 한창 수다를 떨고 있었다. 비탈을 오르느라 동네 주민들은 작은 손수레가 기본 장비인 듯싶다. 아랫마을에서 장을 봐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골목을 걸어 오를수록 예사롭지 않은 다양함이 눈에 들어온다.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쓴 개량한옥들이 보이다가, 제법 커다란 저택이 골목에 내려다본다. 또 다른 골목은 서울의 평범한 공동주택들로 길을 채우고, 어떤 골목은 시간여행 속에서 볼 듯한 블록집들로 과거의 모습을 보여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 <기생충>의 가난한 집과 골목을 북아현동에서 찍었다고 하니 이곳은 우리 시대 결핍의 흔적인 셈이다.

종종 1930년대 지어진 주택도 볼 수 있다.

종종 1930년대 지어진 주택도 볼 수 있다.

북아현동은 우리 문학과 예술에 깊은 영감을 준 곳이다. 정지용은 이곳에 살며 시를 지어 “서울에서도 꾀꼬리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라 예찬했다. 윤동주 또한 연희전문 시절 이 일대에서 하숙하면서 시심을 키웠다고 한다. 그 때문에 북아현동 골목엔 정지용을 기억하는 ‘지용소공원’이 있는데, 시 ‘향수’를 새긴 나무판과 함께 꼭꼭 숨어 있다. 여차하면 지나치기 쉬우니 아주 잘 살펴야 소공원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타계할 때까지 이 골목에서 살면서 소설을 썼던 박영준의 집터엔 표지석이 그를 기리고 있고, 그의 호를 딴 ‘만우소공원’도 남아 있다. 오르막길 중턱엔 가야금 작곡가 황병기와 소설가 한말숙 부부의 집이 있었다는데 지금도 그곳에서 사는지는 알지 못한다. 예전엔 그 골목을 걸어가면 그윽한 가야금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최인호는 신혼 시절 북아현동 월세방에서 소설 <별들의 고향>을 써서 이름을 날렸다. 그 밖에도 북아현동 골목 구비엔 여러 예술가의 흔적이 숨어 있다.

예술·문학에 깊은 영감 준 곳

아현동 일대 예술과 문학의 인연은 그 뿌리가 깊다. 조선시대 책을 빌려주던 도서대여점인 세책가들이 아현 일대에 몰려 있었다고 한다. 사대문 밖이지만 광화문과 가깝고 마포나루의 물건들이 아현동을 통해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이라 유통업에는 요지였던 셈이다. 세책가는 책의 유통을 위해 필사본이나 목판인 방각본으로 출판한 책들을 돈을 받고 빌려주던 대여점이었으니 독립출판과 콘텐츠 유통의 선구적인 기원이 아현 마루 일대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다.

주택가 곳곳에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숨어 있다.

주택가 곳곳에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숨어 있다.

금화 시민아파트에서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뻗어내린 골목길의 이름은 농방길이다. 그 길을 따라가면 아현동 가구골목에 이르게 되는데, 예전엔 이 골목 집마다 가구를 만드는 농방이 줄지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하나 지금 농방길에 농방은 보이지 않는다. 북아현동의 가구골목은 서울의 몇몇 가구 상가에 비해 서민과 가깝다. 왕십리 중앙시장은 식당과 업소용 가구가 많고, 을지로는 인테리어용과 카페용 가구, 사당동은 사무용 중고가구가 많으며, 논현동은 수입제품을 비롯한 고급 가구가 중심인데 비해 북아현동 가구골목은 그야말로 생활 가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코로나19에 겨울까지 겹쳐 손님 보기 어렵다고 푸념하던 가구점 주인은 “이사철이나 입학철에 손님이 많다. 여기는 늘 부침이 있어 이 일대 재개발 건축 입주 철이 오면 또 호황이 찾아올 것이다. 꽃이야 매번 피고 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침대부터 주방가구, 아파트용 시스템 가구부터 주머니 얕은 이들을 위한 중고 소품가구까지 골목을 가득 채운 가구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겨울은 춥고 아주 오래된 가구골목은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골목 대부분은 비탈길에 기대어 있다.

골목 대부분은 비탈길에 기대어 있다.

1970~1980년대 형편 좋던 시절에는 가구골목과 함께 웨딩업체들이 점령하고 있어서 갖가지 화려한 웨딩드레스와 결혼 상품을 볼 수 있었다고 하나 지금 웨딩업체 대부분이 강남으로 건너갔다. 아울러 서민들의 저녁 귀갓길을 맞이하던 포장마차촌도 사라졌다. ‘아포’라는 약칭의 아현동 포차촌은 한때 명물이었으나 주변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40여년의 역사를 접었다. 북아현동을 관통하는 경의선 철길은 아직도 살아 있다. 철길 아래 굴다리도 남아 있고, 하루 몇차례 지나가는 기차는 옛 기억을 돌이키기에 충분했다. 시절이 좋아지면 이 철로를 따라 다시 신의주까지 길이 열릴 수도 있다는 꿈을 꾼다. 그런 바람 때문에 북아현동을 지나는 철길은 소중한 셈이다.

낯설면서 정겨운 풍경 남아 있어

북아현동 가구골목은 한때 가장 큰 가구 시장이었다.

북아현동 가구골목은 한때 가장 큰 가구 시장이었다.

철길을 건너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금화장 오거리가 나온다. 아래 골목과는 풍경이 확 달라져 일제강점기 일본식 가옥들이 눈에 띈다. 금화장은 백범 김구의 유품이 잠시 머물렀던 인연이 있던 곳이라 했는데 지금은 철거됐다. 오거리에 이름만 남아 있지만 마을 사람은 그 이름과 백범을 기억했다. 사람의 명성이란 쉽게 쌓을 수도 허물 도리도 없음을 이 골목에서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안산 쪽으로 깊숙이 다가설수록 아랫마을의 재개발과는 전혀 상관없는 서울 속 박제된 시간을 만날 수 있다. 1930년대 건물과 2000년대 건물이 혼재하고, 간판들은 1970년대에 머물다가 가게 안 상품은 오늘에 이르는 기묘한 시간의 왜곡이 그 속에 있다. 한걸음 떨어져 지나쳐가는 구경꾼의 입장에선 이보다 좋은 구경거리가 더 없겠다 싶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기란 또 녹록지 않을 것이다.

옛 북아현동은 도시계획 따라 만들어진 마을이 아니라고 했다. 시대의 흐름 따라 제각각의 사연을 가지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흘러들어와 산마루 능선과 골을 따라 자리를 잡고 견딜 수 있을 만큼 자기 자리를 차지하며 자연스럽게 생겨난 마을이라 했다. 때문에 골목은 자연스럽고 물길이 흘러가듯 골짜기를 파고들었다. 편한 요즘 세상이 와서야 가파른 길목이 힘겨운 장애가 됐지만, 북아현동은 자기 힘으로 도시에 뿌리를 내린 사람들의 터전이다. 시대가 변했으니 주거도 골목의 형국도 변해가는 것이고,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낯설면서 정겨운 풍경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도시정비사업으로 북아현오거리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도시정비사업으로 북아현오거리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북아현동 골목을 걸으면 곧 사라질 위태로운 풍경들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살아 관통해온 시간과 삶의 형식이 낯익은 모습으로 골목과 골목에 박혀 있다. 힘겹게 비탈을 오르는 노인에게 “요즘 어때요?” 물어보자 그는 “별일 없다. 살아야 하니까 사는 것”이라고 답했다. 젊고 새로운 것들이 점차 영역을 넓혀 오래된 것들을 밀어내더라도 살아가야 하는 길은 살아야 함을 북아현동 골목길에서 배운다.

큰 길가로 나오면 요란한 부동산 표지판들이 눈을 어지럽게 한다. 재개발 촉진지구 임박을 알리며 지금 사지 않으면 큰 손해를 볼 듯 사람들을 재촉하고 있고, 오래된 집주인들은 그래도 행여 하며 발길을 멈추고 부동산 게시판을 둘러보다 간다. 아현동의 대부분이 재개발된 지금 조금 남아 있는 북아현동 일대도 언제까지 지금의 모습을 간직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골목길 유람을 떠날 때다. 이제 가면 영영 만나지 못할 지난 시절의 모습이 그곳에 있으니 향수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북아현동 골목길을 걸어야 하리라. 정지용 시인이 살던 때 이 산비탈엔 ‘조선 황국’이 그리 아름답게 피었다고 한다. 지금 그 노란 국화 꽃잎은 볼 수 없어도 골목 사람들이 황국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북아현동을 걷자.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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