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지자체에 브랜드가 꼭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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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관악구 남현동에는 ‘서정주의 집’이 있다. 서정주 시인이 1970년부터 2000년 사망 시까지 30년간 살던 집이다. 2003년 서울시가 관악구에 교부금 7억5000만원을 지원해 관악구가 매입했고, 2009년부터 서울시와 관악구가 13억원의 예산을 들여 리모델링을 해 2011년 개관했다.

서울 관악구 남현동 ‘서정주의 집’ / 관악구 제공

서울 관악구 남현동 ‘서정주의 집’ / 관악구 제공

서정주는 일제와 전두환 찬양시를 썼던 사람이다. 지속적으로 논란이 된다. 서정주의 집을 계속 유지해야 할까? 필자가 구의회에서 몇차례 문제를 제기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첫째, 아픈 역사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유지하자는 지역여론이 있다.

‘다크투어리즘’은 재난이나 끔찍한 사건의 장소를 방문하는 행동을 의미하는 대안관광이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강제수용소인 아우슈비츠가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전환한 사례가 있다.

서정주의 집은 유품과 저서들을 전시하고 있을 뿐 그의 친일행적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다. 다크하지 않다. 히틀러 생가를 박물관으로 활용한 전례가 있긴 하지만, 이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그곳이 나치의 성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고, 지난해에 경찰서로 전환하기로 했다. 네오나치들이 경찰서 앞에선 집회를 못 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친일인사의 가옥을 다크투어리즘의 명목으로 보존해야 한다면, 전두환이 살던 연희동 자택도 문화유산으로 남길 것인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 ‘중대범죄자이지만 3저호황으로 경제성장을 이끌었다’는 안내판 하나 놓고 그의 유품을 전시할 것인가.

다크투어리즘은 사실 핑계에 불과하다. 인근 지역주민들이 서정주의 집 존치를 원한다는 것이 현실적인 이유일 것이다. 지역에 뭐라도 관광자원이 있는 게 좋다는 것이다. 관악구는 서정주의 시비(詩碑)를 관악산과 남현동 공원에 세우기도 했다. 이 또한 문화관광사업의 일환이다.

서정주가 남현동의 브랜드라면, 관악구가 내세우는 브랜드는 강감찬이다. 강감찬 장군의 생가터를 표시한 고려시대 삼층석탑을 1960년대에 발견했다. 1970년대에 낙성대공원을 조성했고 사당과 기념관 등을 지었다. 그 정도면 좋았을 것을, 2010년부터 지역축제가 강감찬 축제가 됐고, 2018년부터는 강감찬 캐릭터를 관악구 전체에 도배했다.

서울의 자치구들은 저마다 다른 문화나 역사를 자랑할 만큼 넓지 않은데, 자체적인 브랜드를 만들려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다. 지역경제를 살려야 하고, 관광객을 받아야 하고, 관광자원을 개발해야 한다. 관악산에 오르는 사람은 많아도 서정주의 집이나 강감찬 생가터를 방문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관악구는 자체적인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서정주의 집을 보존하고 강감찬 캐릭터를 내세운다. 그 지역 밖에선 거의 아무도 모르지만, 226개의 기초자치단체가 대체로 이런 노력을 하고 있다. 지역축제를 하고 조형물을 만드는 이유도 다 브랜드다. 실제 관광객 유치와 지역경제 활성화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남들이 하는 만큼 우리도 노력했다는 사실만 중요하게 생각한다.

브랜드란, 말하자면 프로스포츠의 영구결번 같은 것이다. 한 시즌 MVP 정도로 영구결번이 될 수는 없다. 억지로 역사를 만들어내기보다 조용히 기억하는 방법도 있다. 노브랜드라도 살기 좋은 지자체를 만들 수 있다. 한국프로야구에서 영구결번 한 사람 없이 우승한 kt 위즈도 있지 않은가.

<이기중 서울 관악구 정의당 구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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