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학교도서관에서… 자유가 묶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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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명 만화가이자 동화작가인 제리 크래프트는 지난해 어느 날 자신의 작품 중 일부를 텍사스주의 학교도서관이 퇴출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뉴욕의 유명 예술학교 ‘스쿨 오브 비주얼 아츠’를 졸업한 크래프트는 흑인인 자신의 정체성과 경험을 녹여 넣은 작품으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는 2020년 청소년 소설에 만화를 가미한 작품 <뉴 키드>로 아동용 도서에 수여하는 최고 영예의 상인 ‘뉴베리 메달’을 비롯한 다수의 상을 받을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뉴 키드>는 예술학교에 가서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흑인 중학생 조던이 부모의 반대로 백인이 다수인 명문 사립학교에 진학한 이후 느낀 이질감과 문화적 충격 그리고 이를 헤쳐 나가기 위한 노력을 그린 작품이다. 크래프트는 미 NBC방송에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면서 “아이들이 내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나쁜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만화가이자 동화책 작가 제리 크래프트가 ‘뉴베리상’을 받은 그의 대표작 <뉴 키드>를 들고 있다. 미국 텍사스주의 한 교육구는 지난해 흑인 중학생이 겪는 인종적 편견과 갈등을 다룬 <뉴 키드>가 비판적 인종이론을 담고 있다면서 학교도서관에서 일시 퇴출시켰다가 이에 반발하는 학부모들의 반발에 부딪쳐 원위치시켰다. / 제리 크래프트 홈페이지

미국 만화가이자 동화책 작가 제리 크래프트가 ‘뉴베리상’을 받은 그의 대표작 <뉴 키드>를 들고 있다. 미국 텍사스주의 한 교육구는 지난해 흑인 중학생이 겪는 인종적 편견과 갈등을 다룬 <뉴 키드>가 비판적 인종이론을 담고 있다면서 학교도서관에서 일시 퇴출시켰다가 이에 반발하는 학부모들의 반발에 부딪쳐 원위치시켰다. / 제리 크래프트 홈페이지

텍사스주의 한 교육구는 지난해 10월 크래프트의 작품에 ‘비판적 인종이론’을 가르친다는 일부 학부모들의 비판이 쇄도하자 <뉴 키드>와 <클래스 액트> 두 작품을 관내 모든 학교도서관에서 일시적으로 퇴출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과도한 검열이라는 반대 여론이 빗발쳤고, 크래프트의 작품은 겨우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크래프트의 책을 둘러싼 소동은 미국 전역의 학교도서관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싸움의 한 장면에 불과하다. 특정 도서를 학교도서관 서가에서 퇴출해야 한다는 일부 학부모들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는가 하면 요구의 폭도 넓어지고 있다. 전미도서관협회 산하 ‘지적 자유 사무소’에 따르면 2019년 미국 전역에서 566권이 지적을 받았고, 코로나19로 대부분의 학교가 문을 닫은 2020년에는 273권이 공격을 받았다. 2021년 전체 통계는 아직 집계하지 않았지만, 지난해 9월부터 11월까지 석 달 동안 330권을 금서 목록에 올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성소수자 이슈 등 다룬 작품 타깃

전미도서관협회는 학교 또는 도서관이 서가에서 빼거나 교육청이 수업에서 활용하지 못하도록 한 책을 금서로 분류한다. 지적 자유 사무소의 데버라 콜드웰-스톤 국장은 인터넷매체 악시오스에 “지난 20년간 이 사무소에서 일하면서 이처럼 단기간에 많은 양의 문제 제기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텍사스주 소재 도서관에서 29년간 근무하다 퇴직한 사서 캐롤린 푸트도 “내가 전에 근무했던 지역에선 주목할 만한 문제 제기가 대략 2년에 한 번씩 들어왔다”면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정말로 전대미문의 사건이라 할 만하다”고 말했다.

보수 성향의 백인 중산층 교외 거주 학부모들이 주축을 이룬 학교도서관 금서 추진 세력이 주요 타깃으로 삼는 책은 동성애 등 성소수자 이슈를 다루거나 흑인 등 유색인종이 주요하게 등장하는 작품이다. 유타주의 한 교육구는 지난달 흑인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앤지 토머스의 <당신이 남긴 증오>와 애슐리 호프 페레스의 <아웃 오브 다크니스>를 금서로 결정했다. 두 작품은 청소년 소설로서 흑인 등 유색인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인종주의를 문제 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부 학부모들이 두 작품이 외설스럽고 신성모독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교육청은 투표를 통해 두 작품을 학교도서관에서 퇴출하기로 결정했다.

매트 크라우스 텍사스주 하원의원은 지난해 가을 인종 및 성과 관련해 학생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850권에 달하는 금서 목록을 만들어 주 내 모든 학교도서관이 해당 작품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보고하라면서 압박하고 나섰다. 아동·청소년에게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최신 작품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 실제로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의 한 교육구는 이 가운데 400여권을 학교도서관에서 퇴출하는 조치를 취했다.

전미도서관협회가 ‘금서주간’을 맞아 제작한 검열 반대 포스터. 미국 학교도서관들은 폭력, 동성애, 아동 세뇌, 인종주의, 외설 등 다양한 이유로 금서 목록을 작성해야 한다는 학무모들의 조직적인 요구에 직면해 있다. / 전미도서관협회 홈페이지

전미도서관협회가 ‘금서주간’을 맞아 제작한 검열 반대 포스터. 미국 학교도서관들은 폭력, 동성애, 아동 세뇌, 인종주의, 외설 등 다양한 이유로 금서 목록을 작성해야 한다는 학무모들의 조직적인 요구에 직면해 있다. / 전미도서관협회 홈페이지

진보적 학부모들도 “금지” 목소리

학교도서관에 꽂혀 있는 책들을 공격하는 게 우파 진영의 전유물은 아니다. 진보적인 학부모들도 흑인을 비하하는 인종적 욕설을 담고 있거나 백인이 자기만족을 위해 유색인종에게 도움을 베푸는 이른바 ‘백인 구원자(white savior)’ 성향의 작품을 학교 교육에서 금지하라고 주장해왔다.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존 스타인벡의 <생쥐와 인간> 등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도 전미도서관협회의 금서 목록에 자주 오른다. 콜드웰-스톤 국장은 진보 성향 학부모들의 문제 제기는 단발적인데다 우파 성향 학부모들이 가하는 압력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라고 밝혔다.

학교도서관을 겨냥한 우파 진영의 광범위한 금서 추진 운동은 미국 학교 현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열한 문화 전쟁의 일환이다. ‘비판적 인종이론’을 향한 보수 진영의 공격이 배경에 깔려 있다. 비판적 인종이론은 미국사회의 인종차별을 개인적 편견에 따른 행동의 총합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라고 지적하는 내용이다. 공화당을 위시한 보수 진영은 비판적 인종이론이 미국인들의 자부심을 떨어뜨리고 모든 백인을 잠재적인 인종차별주의자로 취급함으로써 결국 분열 조장으로 이어진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최소 9개주에서 초·중·고교의 비판적 인종이론 교육을 법으로 금지했다. 보수 성향 기독교인들의 동성애 반감도 작용하고 있다. 미국 학교 현장에서 커진 다양성의 백래시(반발)로 나타난 첨예한 정치적 양극화 현상의 반영이기도 하다. 시민단체 ‘자유를 위한 엄마들’의 공동 창립자 티파니 저스티스는 “아이들에게 외설적인 내용이 담긴 책을 제공해놓고 우리더러 왜 그 책을 금지해야 하느냐고 묻는 것 자체가 모욕”이라고 말했다.

갈수록 심해지는 우파 진영의 학교도서관 공격은 학생들이 다양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 것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금서 추진 운동이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정치운동의 도구일 뿐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콜드웰-스톤은 “소외된 공동체의 목소리를 학교도서관 서가에서 제거하려는 운동이 조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면서 “헌법과 권리장전을 수호해야 할 선출직 공직자들이 이런 책들을 제거하는 노력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이 특히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워싱턴┃김재중 특파원 herm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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