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가 아닌 연대에 확성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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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4일 서울 은평구를 찾은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유세단’을 동행 취재했다. 유세단이라 불리지만, 이들은 모두 선거와 무관한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가들이다. 지난 1월 11일까지 63일간 여의도 국회 앞에서 노숙 농성을 했고, 새해를 맞아 유세단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활동을 시작했다. 낮 12시 연신내역에서 합류해 유세차에 올라탔다. 난간을 붙잡자 찬기가 올라왔다. 옆에 선 활동가가 “장갑을 왜 안 끼고 왔느냐”며 타박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 날씨에 양말 2겹, 장갑, 내복은 필수예요”라고 했다.

지난 1월 14일 서울 은평구 구산역에서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유세단’과 은평구 시민·시민단체 활동가 50여명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 이유진 기자

지난 1월 14일 서울 은평구 구산역에서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유세단’과 은평구 시민·시민단체 활동가 50여명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 이유진 기자

유세단은 유세차와 승합차를 번갈아 타고 은평구 일대를 누볐다. 맹추위에 유세차를 10분 이상 타는 건 무리였다. 승합차에서 몸을 녹이던 이들에게 왜 다시 거리로 나왔는지 물었다. 단체는 차별금지법의 2021년 연내 제정을 촉구하며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국회 앞 노숙 농성 외에도 부산부터 서울까지 이어지는 도보행진, 국회 포위 깃발 액션, 송년 문화제 등 말 그대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승합차엔 손팻말을 비롯해 유세 활동에 필요한 물건들이 잔뜩 실려 있었다.

“사실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거든요.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싶어요. 그런데 막상 거리로 나오니까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여전히 차별금지법이 뭐냐고 묻는 분들이 많거든요.”

장예정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이 말했다. 이날도 차별금지법을 궁금해하는 시민들이 적지 않았다.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실현하려면 꼭 필요한 법이에요.”

활동가의 설명에 한 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20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온갖 주장이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쏟아지고 있다. 거대 양당 대선후보들이 2030 남성을 겨냥한 공약 행보에 집중하면서, 혐오 정서를 부추기는 일부 남성들의 목소리를 과잉대표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성·소수자 의제를 담은 기사는 출고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싫어요’가 수십개씩 달린다. 약자를 향한 공격에 기사를 쓴 기자는 좌불안석이고, 일부 언론사는 대응 차원에서 포털 댓글창을 강제로 닫기도 한다. 최근엔 제1야당의 대표가 가면을 쓰고 방송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한 일도 있었다. 그는 이 방송에서 다른 정당의 대선후보를 비판하고, 소속 정당 대선후보를 감쌌다. 기존의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을 익명으로 거듭 강조했다. 이미 엄청난 발언권을 가진 정치인이 방송사를 통해 또 다른 발화 권력을 획득하다니, ‘참 치사하다’ 싶었다. 강자의 목소리는 더 커지고, 약자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됐다.

다시 은평구. 유세차가 구산역에 가까이 가자 멀리서 손을 흔드는 무리가 보였다. 은평구 시민·시민단체 활동가 50여명이 구산역 3번 출구 앞에서 유세차를 환영했다. “고생한다”며 부둥켜안는 사람들 사이를 교복 입은 한 학생이 비집고 지나갔다. 두 손으로 양쪽 귀를 막고 있었다. ‘듣기 싫다’는 의사표시였다. 그게 전부였다. 인터넷에 난무하는 욕설과 혐오발언은 없었다.

확성기를 단 혐오가 아닌 연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다. 그날 그 거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비록 속삭이듯 작은 소리일지라도….

<이유진 사회부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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