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내시장-작아진 시장…그래도 사람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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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중앙선 가좌역을 나서면 모래내라는 옛 이름을 가진 동네가 있고, 그곳에 모래내시장이 있다. 시장은 한때 서울의 4대 시장으로 불릴 만큼 번영했으나 지금은 겨우 골목에 깃들어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이마저도 곧 시들어버릴 형편이다. 모래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홍제천의 이름에서 유래했고, 그 흔적은 모래내시장 인근 홍제천 교량인 사천교(沙川橋)에도 남아 있다. 모래내는 늘 범람하기 일쑤였고, 홍제천에 둑을 쌓아 막으면서 비로소 사람 살 만한 곳이 됐다고 한다. 토박이에게 이곳은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는 땅이었다는 오래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모래내시장은 한때 서울의 4대 전통시장이었으나 지금은 규모가 크게 줄었다.

모래내시장은 한때 서울의 4대 전통시장이었으나 지금은 규모가 크게 줄었다.

모래내 인근 남가좌동과 북가좌동 일대가 가재울 뉴타운 사업이 시작되자 달동네는 정비돼 사라지고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옹기종기 무질서하던 집들과 골목이 사라진 대신 높고 거대한 아파트가 가재를 잡던 개울가의 주인이 됐다. 덩달아 모래내시장은 잘리고 부서지고 토막이 났다. 과거의 영광은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고, 시장은 골목 하나에 겨우 잇대어 이리저리 뻗은 모습으로 남았다. 영토 대부분은 잠식됐지만 아직도 모래내시장은 사람들로 붐빈다. 과일과 채소와 고기를 파는 상인들이 수십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고, 대대로 단골인 손님들도 여전히 모래내시장을 찾는다.

대부분 사라진 골목

모래내 일대가 아파트단지로 개발되면서 대부분의 골목은 사라졌다. 유일하게 남은 골목은 시장 주변뿐이다. 미로를 이루던 골목은 아파트단지의 통로로 대체됐다. 그 입구마다 “이곳은 사유지입니다. 외부인의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살벌한 경고문이 붙어 있다. 개발에 밀려 골목뿐 아니라 주변 서중시장이나 여러 시장도 사라지고 말았다. 시장은 그대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주변의 통로로 퍼져 자리를 잡고 있다. 공사장의 거대한 패널을 등지고 해물이며 과일과 채소, 건어물과 옛날 과자를 파는 노점들이 길 반쯤을 차지하고 있다. 상인과 손님은 오래 아는 처지라 서로의 겨울나기를 걱정한다. “김장은 했나?”, “올해 김장은 며느리 눈치 보며 물어보고 담그느라 늦었다. 작년엔 청각을 넣었다가 아주 혼났다”, “그 집이나 우리나 맘대로 살던 시절은 끝났다. 요즘엔 자식이 상전이고 며느리는 벼슬이다”며 웃는다. 김장 소 하나도 물어보고 내용을 갖춰야 퇴박맞지 않는다고 했다. 오래된 삶의 방식을 더 이상 지킬 수 없다는 것은 모래내와 가재울 주변의 바뀐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사라지든지 변하든지 선택은 둘 중 하나뿐이다.

시장 주변을 서울형 골목길로 만든다는 발표가 있었으나 뒷소식이 없다.

시장 주변을 서울형 골목길로 만든다는 발표가 있었으나 뒷소식이 없다.

시장 골목 사거리에 커다란 솥을 걸고 펄펄 끓는 팥죽을 끓이고 있다. 동지팥죽, 주인은 국산 팥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국산 팥은 구하기도 쉽지 않지만, 때깔이 다르다. 맛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사람들은 팥죽 장수를 에워싸고 줄을 서서 팥죽을 사가고 있었다. 살아남은 모래내시장 가게 중에는 손님이 줄을 선 곳도 여럿 있다. 정육점엔 오후 한낮에도 줄지어 고기를 끊어가는 이들이 보인다. 줄 선 모습만으로 그 가게 물건의 질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떡집도 손님들이 모여 있다. 가래떡을 사가는 손님은 “우리 집은 팥죽에 새알 대신 가래떡을 넣는다. 별미인데 남들은 잘 모른다”고 설명했다. 손님들의 주문에 맞추느라 떡집 주인의 손길도 바쁘게 움직인다.

시장의 겉모습은 쇠락해 건물들은 대부분 40~50년은 돼 보였지만 주인이나 손님이나 그런 외관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건물을 둘러보는 대신 좌판 앞 물건을 골라보고 주인과 눈을 맞춰 익숙하게 흥정을 한다. “포항초가 한단에 3000원인데 두단 사면 반단은 더 줄 수 있다”고 한다. 해물가게 주인은 이번에 들어온 꼬막이 물이 좋고 맛있다고 강조한다. 과일 노점상은 단골 노인에게 큼직한 귤 하나를 까주면서 “병원 가느니 맛있는 것 사먹고 행복하게 지내는 게 최고”라고 너스레를 떤다.

팥죽을 파는 노점과 몇몇 가게는 손님들이 줄을 선다.

팥죽을 파는 노점과 몇몇 가게는 손님들이 줄을 선다.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도

가게 사이로 샛골목이 숨어 있고, 그 골목을 들어서면 시간이 멎은 풍경을 엿볼 수 있다. 골목에 쌓인 냉장고와 잡동사니들, 좁고 어두운 골목 사이 공동화장실, 요즘엔 보기 드문 모습들이다. 모래내 일대가 세상 이곳저곳에서 떠밀려와 살던 부초들이 잠시 걸쳐 머물던 모래톱과 같은 곳이었다는 모습을 시장 뒷골목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모래내시장 주변에도 어디에나 있는 먹자골목이 제법 큰 골목을 차지하고 있다. 저녁이 되면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붐빌 수 있겠으나 오후의 먹자골목은 황혼의 모습이다. 인적은 드물고 가게들은 저녁 장사를 기다리는 듯 대체로 문을 닫고 있다. 요즘 어디라도 북적이는 곳이 드문 건 사실이나 모래내 먹자골목의 사정은 한층 심란하다.

몇몇 시장은 사라지고 아파트로 통하는 길목으로 퍼졌다.

몇몇 시장은 사라지고 아파트로 통하는 길목으로 퍼졌다.

20년 넘도록 꼬박 가게문을 열었다는 분식집 주인은 “여긴 이제 끝물인 것 같다. 손님들도 노인들이 많아 아직도 출입객 명부를 수기로 쓰는 곳이 태반이다. 어른들은 QR코드를 못 쓰는 분들이 대부분이니까”라고 했다. 해질녘 겨울바람이 골목을 더 매섭게 쓸고 지나간다.

버스정류장 앞에 오랜 세월을 버티고 서 있는 상가아파트가 있다. 문구점부터 인력사무소, 맞춤양복집과 한의원, 댄스교습소까지 온갖 업종이 전을 펼친 주거복합건물이다. 건물을 들어서면 ‘구조안전 위험시설물 알림’이란 경고문이 위협한다. 어두운 통로에 혼자 앉아 있던 주민 한 사람이 “여긴 볼 것도 없는데 뭘 둘러보냐?”며 날 선 질문을 던졌다. 여긴 빈집도 여럿 있다고 했다. 어두운 통로에 전등 하나 켜 있지 않은 모습에서 이곳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옷 수선집만 흐린 형광등 불빛을 밝힌 채 바쁘게 일하는 주인의 모습이 보인다.

모래내 먹자골목은 위축된 모습이 보인다.

모래내 먹자골목은 위축된 모습이 보인다.

2층으로 올라서자 넓은 중앙 통로 정면으로 잘 차려입은 중년의 남녀들이 박자에 맞춘 듯 드나들고 있다. 쿵짝쿵짝 ‘콜라텍’의 신나는 음악이 심란한 건물 속을 흔들듯 파고들고, 출입객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때때로 웃음을 터뜨린다. 인생은 빛나고 시절은 즐겁다.

상가아파트 사이 골목은 별천지다. 낮시간 모두 문을 닫고 숨죽이고 있지만 간판들은 정체를 감추지 못한다. ‘오아시스’, ‘흑장미’, ‘연정’, ‘로즈’, ‘단비’ 등…. 가게 안을 볼 순 없지만 이름과 오색등만으로도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명백한 가게들이 줄을 잇고 있다. 강남의 유흥가와는 결이 달라도 환락과 유흥을 파는 골목이 아직 남아 있다. 20세기풍의 주점들이니 레트로가 유행인 요즘 시절과 어울릴 수도 있으려니 싶다. 살펴보니 골목 끝을 이어 다음 골목까지 온통 그렇고 그런 술집들이 펼쳐진다. 잇대어 여관들이 옹기종기 골목을 지배하고 있다.

모래내 일대는 대부분 아파트단지가 들어섰고, 몇몇 공동주택들이 남아 있다.

모래내 일대는 대부분 아파트단지가 들어섰고, 몇몇 공동주택들이 남아 있다.

오늘내일이 위태롭다

상가 뒤편 좁은 골목엔 1000원짜리 커피를 파는 커피집이 문을 열고 있는데, 주종목보다는 잔치국수와 콩나물밥, 수제비와 칼국수가 더 많이 팔린단다. 테이블엔 커피 대신 소주를 마시는 손님이 보인다. 근처 옷수선집 주인은 사라호 태풍 때 한강변의 집이 떠내려가 부모와 함께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때 왔던 사람들은 이제 거의 안 남았단다. 세월도 많이 지났고 재개발로 흩어진 것이다. 모래내와 가재울 일대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한 건 물난리 직후 이재민 이주 때부터였다. 그 전에는 그야말로 호랑이가 나올 만큼 외진 곳이었다. 산 주변에 군대식 천막을 치고 이주민들이 옮겨왔고, 서울 시내 여기저기서 흘러들어온 이들이 터를 잡아 이룬 곳이 가좌동 일대, 지금의 모래내와 가재울 주변이니 사람이 살아온 역사는 그다지 오래지 않은 터이다. 그럼에도 모래내의 역사는 지도가 바뀐 이래 떠나고 들어온 사람들이 많아 까마득히 잊힌 일들이 되고 말았다.

모래내엔 오래된 대장간이 남아 있고, 원하는 대로 만들어주는 주문형 철공소도 여태 문을 연다. 철공소와 대장간에선 옛날식 농기구를 만들지만 대부분 요즘 공사장에서 필요한 장비들도 제작하고 수리해준다. 서울 서부지역의 개발이 이어지면서 건축노동자들에겐 이 일대가 일거리가 넉넉한 곳이기도 하다.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은 없고 만물은 유전한다. 지도도 바뀌고 집의 모양과 삶의 형태도 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변화엔 두려움이 있고 더러 희생도 따른다. 할 일 없이 시장 어귀에 나와 앉아 행인을 보는 텅 빈 시선의 노인네는 그 변화의 희생을 혹독히 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모래내시장은 많이 변했다. 시장은 크게 줄어들었고, 주변의 골목은 오늘내일이 위태로운 모습이다. 한때 모래내시장 주변을 서울형 골목길로 만들겠다는 희망찬 계획도 발표했지만, 어쩐지 뒷소식이 멈춘 상태다.

살아 있는 한 시장은 꼭 필요한 곳이다. 물건을 사고파는 것 외에도 어떤 이에겐 세상 돌아가는 실정과 속내를 살피고 나누는 장소다. 모래내시장이 줄어드는 형국은 이전과 다른 삶이 이 지역에 번져나간다는 뜻이고, 결국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좋은 일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가슴 벅찬 일이기도 하다. 시장상인 누군가는 “먼저 보상받아서 떠난 사람이 이겼다”라고 말하지만, 일생 살아온 방식을 송두리째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변하는 것이 순리일지라도 넉넉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밉지 않은 흥정과 실랑이를 벌일 수 있는 터전이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쉽다. 살아가는 일은 부대끼며 서로 속내를 나누고 미워하면서도 아끼고 보듬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래내시장 골목이 그런 곳이다. 오래도록 옛이야기를 하며 아들 며느리 흉도 볼 수 있는 소통의 장소로 남았으면 좋겠다. 모래내시장에선 시금치 한단을 사도 훈훈한 덕담을 들으며 기분 좋은 인심을 느낄 수 있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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