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상 나와보이 뭐할지 감도 안 오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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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엔 대기업 고졸 생산직 채용 붐이 일었다. 우리 학교도 마찬가지라 복학생 형님들이 너도나도 졸업을 유예하고 삼성에 취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0명 중 절반 넘게 1년 이내로 관뒀다. 연봉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업무는 고됐다. 그나마 대기업에 다닌다는 자부심마저 하루 11시간 주야교대 단순 라인 작업만 하다 보면 반년 내로 동난다. 구미 삼성공장에서 일했던 한 형님의 입에 착착 감기는 후기가 잊히지 않는다. “그 돈 받고는 그 짓 못 한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갑작스레 찾아온 악재 ‘대량 정리해고’

은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기업 정규직이 됐지만 삶은 변하지 않았다. 상여금이 많아지긴 했지만 최저 언저리의 시급은 그대로. 오히려 골치 아픈 일만 늘었다. 직영의 생산관리 부장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개저씨’였다. “여자들이”로 시작하는 성차별 발언, “오늘은”으로 시작하는 외모 품평은 기본이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저열한 언어를 꼭 집어넣곤 했다.

특히 어리고 말수가 적은 은주는 정글 한복판에 놓인 고깃덩어리였다. 문신, 염색, 피어싱, 빼빼 마른 몸, 출퇴근용 스쿠터까지 그야말로 온갖 게 다 시빗거리였다. 주변에 하소연하는 방식도 오래가질 못했다. 친구들 대다수가 일자리 없는 창원을 떠났다. 그나마 남은 대학생 친구들과의 만남도 점차 줄어갔다. 트위터에 글을 남겨봤지만, 리트윗과 공감수는 늘 ‘0’이었다. 20대 초반 공순이란 정체성이 낄 장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가족 곁을 떠나 방황하는 죗값을 받는다고 생각하며 회사에 다닌 지 3년차. 지긋지긋했던 월세 생활을 청산한 쾌감이 가시기도 전에 대형 악재가 터졌다. 2012년, 노키아가 대량 정리해고를 시작한 것이었다.

“월급 반년치에 실업급여까지 준다 카데. 처음엔 아싸리 잘됐다 싶어가 얼른 나왔다. 근데 와, 막상 나와보이 뭐할지 감도 안 오데.”

공장 생산직 경력은 취업 시장에서 아무 쓸모가 없었다. 비슷한 직장은 많되 노키아만큼 받아갈 수 있는 곳은 전무했다. 제조업 생산직의 함정인 영원한 최저임금의 굴레에 빠진 셈이었다. 차라리 남자였다면 현장직으로 시작해도 승진이나마 가능했다. 하지만 여성은 반장 이상으로 올라갈 수조차 없다. 이마 위에 강철 천장이 도사리는 셈이었다. 실업급여 받는 동안 직업훈련이라도 했으면 좋았으련만, 지방엔 정보와 제도를 받쳐줄 교육기관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은주 자신이 뭘 해야 좋을지 몰랐다. 또래와의 오랜 격리, 끝나지 않는 가난, 오차 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업무 속에서 너무 오래 허우적대고 있었다. ‘앞으로 뭐하지?’라는 의문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실업급여를 받는 동안 나름 책이나 영화도 찾아보고, 홀로 여행도 가봤지만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결국 실업급여 석달 차에 아는 언니의 전화로 다른 직장을 구했다. 창원 LG 사내하청이었다. 업무는 라인작업. 일자리 구했다며 잠깐 안도했던 은주의 상태는 더욱 나빠져 갔다.

“니도 알잖아. 라인 작업 힘들고 지리해서 못하는 거 아이다 아이가. 미래가 없는데 우얄끼고. 고마 돈 하나 보고 하는 짓거린데.”

어떠한 기대도 설렘도 없는 공간에서, 단지 돈 때문에 일하는 게 익숙해진 사람들, 거대한 공장 부품처럼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곧 자신의 미래가 될 것 같아 두려웠다. 한때는 비슷한 나잇대 직장 동료들과 말을 트기도 했지만 금방 멀어졌다고 했다. 또래들은 하나같이 “나는 지금 잠깐 여기서 일하는 것뿐이야. 사실 다른 꿈이 있어”라고 말했다. 혼자 사회에 고립된 느낌 속에서 자포자기하듯 청춘의 시간과 돈을 맞바꾸었다.

“고마 좀비처럼 지냈다. 일하고 집에 와서 누자고. 주말엔 밥 차리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그래 6년 사니께 집안 꼬라지는 좀 나아지데.”

보람조차 없는 힘겨운 삶은 아니었다. 하루종일 병원과 방에 누워 있기만 했던 아버지가 마침내 경비 일을 시작했다. 재수를 거듭했던 동생은 마침내 서울 관악산의 드높은 산성을 넘었다. 대학 합격이 확정된 날, 철없던 남동생이 그간 정말 미안했다고, 어떻게든 누나한테 받은 은혜를 갚겠다고, 지금에라도 누나가 좋아하는 일을 찾았으면 한다고 말한 순간 그간의 삶이 아주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음을 느꼈다고 한다. 스물아홉, 주변에서 다들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기엔 늦었다고 떠드는 나이였다. 통장에는 무심하게 쌓아놓은 돈 6000만원이 있었다. 청춘은 단 한 번의 시효뿐이라지만 라인 조립 일은 마흔이고 쉰이고 계속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맘껏 놀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어느덧 시간이 오후 9시였다. 우리는 마지막 맥주 한잔을 시켰다. “그래서 우째했는데?”라는 내 물음에 은주는 등받이에 어깨를 기대고선 말했다.

“회사 때리치았다. 놀았지. 첨엔 아침에 눈이 자꼬 떠지가 힘들데. 하고 싶은 거 맘껏 해보자 싶어가 오토바이부터 일시불로 긁었다. 장바구니 넣어둔 옷도 싹 주문하고….” 은주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피아노학원에도 가고.”

웬 피아노냐 물으니, 예전부터 꼭 하고 싶었던 취미지만 자격지심이 있었다고 한다. 어쩐지 비싼 드레스를 입고 쳐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나. 일단 시작하고 보니 금방 재미가 붙었다. 대부분 단순 반복뿐인 기초 레슨에서 나가떨어지게 마련이었지만 인내심이 남다른 은주에겐 예외였다. 낮 동안 도레미파솔라시도만 쳐도 즐거웠다. 피아노학원장의 성화로 든 동호회에서 비슷한 취미를 가진 이들과 만나며, 좁고 음습한 지하 골방 같은 세계가 점차 넓어져 갔다. 늦저녁엔 바이크를 몰고 돌아다녔다. 와중에 하루 한두건씩 짬짬이 배달노동도 하면서 남자친구까지 만났다.

그간의 삶, 아주 의미 없는 건 아니었다

옛 회사 사람들이 보면 기겁했을 정도로 제멋대로 지낸 지 3년. 모아 둔 돈은 거의 다 까먹었다. 하지만 전혀 후회하거나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 라인 작업만큼이나 지루했던 삶이 이렇게나 즐거울 수 있음을 알게 됐다. 그 경험 하나로도 세상을 살아내기엔 충분했다. 무엇보다 이젠 함께할 사람도 있지 않은가. 잔을 내려놓은 은주의 약지에 금반지가 번뜩였다.

“남편 놈 난리 치긋다. 인자 인나자.”

앞으로 은주가 어떻게 미래를 꾸려나갈지는 모른다. 무엇을 하건 잘 해나갈 것이고, 사소한 좌절 따위에 발목 잡히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공장 바닥 전전하며 보낸 20대는 그저 통장에 찍힌 얄팍한 숫자 따위가 대표할 수 없다. 사회에서 ‘못 배운 놈년들’로 통칭당하며 냉소와 조소의 대상이 됐던 우리는 자존감을 찌그러뜨리려는 온갖 압력에 저항한 결과였다. 삶의 형태에 고저 따윈 없다는 소중한 지혜를 얻었다. 헤어지는 길에 은주와 나는 약속했다. 우리의 30대는 결코 불행으로 끝마치지 말자고, 다시 만났을 땐 집, 차, 돈, 주식 따위 얘기밖에 남지 않은 멋없는 마흔 살이 되지 말자고. 충충한 가로등빛 아래로 첫 노동을 함께했던 동창의 등이 멀어져 갔다.

<천현우 용접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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