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는 신자유주의 무덤이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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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가 신자유주의의 요람이었다면 이젠 신자유주의의 무덤이 될 것이다.”

좌파연합 ‘존엄성을 지지한다’의 후보 가브리엘 보리치(36)가 지난해 12월 19일 칠레의 새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86년생인 그는 올 3월 민주화 이후 최연소 칠레 대통령이 된다. 1973년 군부쿠데타로 비극적 최후를 맞은 살바도르 아옌데(1908~1973) 이후 이념적으로 가장 왼쪽에 있는 대통령이다. 칠레 제헌의회가 현재 논의하고 있는 새 헌법을 적용받을 첫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는 선거운동 기간 “신자유주의의 종식”을 선언하며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신자유주의는 ‘대처리즘’이나 ‘레이거노믹스’ 이전 칠레 시민의 피와 무덤 위에서 싹을 틔웠다는 역사적 사실이 새삼 환기됐다.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 선거 중 1차 투표의 일부 결과를 얻은 후 주먹을 치켜들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 선거 중 1차 투표의 일부 결과를 얻은 후 주먹을 치켜들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1970년 소아과 의사 출신 좌파 정치인 아옌데가 칠레 대통령에 당선됐다. 세계 최초로 혁명이 아닌 선거를 통해 들어선 사회주의 정부였다. 세계경제가 불경기의 늪으로 빠져들던 무렵이었으며, 칠레에서는 토지 없는 농민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잇달아 시위를 벌이는 등 빈부격차 문제가 특히 불거졌다. 아옌데 대통령은 구리 산업 국영화, 아동 무상 우유 급식, 토지개혁, 사회보장 확대 등을 추진했다. 아옌데 임기 첫해 인플레이션은 34.9%에서 22.1%로 크게 줄었고, 전 정부에서 3%도 이루지 못했던 경제성장률은 8%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사회주의 정책에 불만과 두려움을 품은 강대국과 다국적 기업들이 투자를 끊으면서 칠레 국내총생산(GDP)은 곤두박질쳤고 물가상승률도 140%로 뛰어올랐다. 지주, 고용주, 백인 상류층 등 국내 보수파들도 아옌데의 정책에 반발했다. 아옌데가 구리 광산을 국영화하자 미국은 구리 가격을 일부러 폭락시켜 칠레경제를 뒤흔들었다. 오일쇼크 등 세계적 경제위기도 칠레경제를 혼돈으로 몰아갔다. 1973년 9월 11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당시 국방장관(1915~2006)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궁을 포위하고 아옌데의 교전 끝 자살로 선거를 통해 만들어진 사회주의 정권은 막을 내렸다.

피노체트 군부정권의 비극

피노체트 군부정권은 집권하자마자 아옌데의 모든 정책을 무효화했다. 정권은 미국과 영국의 시카고학파 출신 경제학자들을 초청해 경제정책을 만들도록 했다. 복지·교육예산 등이 삭감됐고, 259개 국영기업 중 14개의 기업과 1개의 은행을 제외하고 모두 민영화됐다. 연금, 보험, 교육, 전력 송배전 등의 공공서비스가 대거 민간영역으로 넘어갔다. 1973년 평균 94%이던 관세율은 1978년 14%로 대폭 내려갔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영국과 미국보다 칠레에서 먼저 만들어졌던 것이다. 해외투자가 재개되면서 1975년 470%까지 치솟았던 물가는 안정됐으며 피노체트 집권 시절 칠레경제는 연평균 6%씩 성장했다. 그러나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빈곤율이 상승했다. 민영화된 연금 체제에서 칠레 노동자들은 기여금 대비 40%도 되지 못하는 연금을 받았고, 대학 등록금은 비쌌다. 정권에 저항하는 시민은 잔혹한 탄압을 받았다. 칠레 정부의 과거사 조사결과에 따르면 17년간의 피노체트 집권 기간 사망자가 약 3000명, 실종자가 1200명 발생했으며 고문 피해자도 수만명에 달한다. 피노체트 시절 국가범죄에 대한 재판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칠레에서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친 뒤에야 대처와 레이건의 시대가 열렸고, 한국의 신군부 정권 역시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였다.

2019년 10월 25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행진하고 있다. / EPA·로이터연합뉴스

2019년 10월 25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행진하고 있다. / EPA·로이터연합뉴스

칠레는 1989년 피노체트를 몰아내고 민주화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1988년 10월 피노체트의 집권 연장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반대가 높게 나온 것이다. 그러나 피노체트 시절인 1980년 제정된 헌법은 이후에도 개정되지 못했다. 피노체트 헌법에는 교육, 의료, 복지 등 국민의 기본권에 관한 내용이 없었으며 노동법률 등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돼 있었다. 민주화 이후 중도좌파 정부가 집권해도 칠레 정부가 떠안은 피노체트 시대의 유산은 해결할 수 없었다. 칠레의 1인당 GDP는 2018년 기준 1만6000달러가 넘는다. 이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지만 인구의 45%는 여전히 빈곤층에 해당한다. 지니계수도 0.46(2017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칠레에서 ‘신자유주의 종식’을 요구하는 대중운동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인 2011년 대학 등록금 인상에 맞서는 시위가 칠레 전역에서 벌어졌다. 당시 칠레대 재학 중이던 보리치 역시 시위를 이끈 학생 지도자 중의 한명이다. 보리치는 2013년 고향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본격 입문했으며, 2017년 재선에 성공했다. 버스요금 인상이 기폭제가 돼 벌어진 2019년 시위에서는 ‘1973=2019’란 팻말 구호도 등장했다. ‘1973년 체제’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야 한다는 요구였다.

최저임금 인상을 주요 공약으로

중도 우파 성향인 세바스타인 피녜라 대통령은 2020년 개헌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쳤다. 개헌을 요구하는 시민의 압력을 더 이상 묵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칠레 국민 78.99%는 개헌을 택했다. 2021년 7월 ‘마푸체’ 원주민 여성인 엘리사 롱콘(59)을 의장으로 하는 제헌의회가 출범해 1년 동안 개헌을 논의했다. 2019년 시위부터 제헌의회 출범까지 이어진 좌파 시민운동이 보리치의 당선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칠레 시민은 ‘신자유주의 종식’에 대한 지지와 양극화된 경제만큼 깊고 넓은 분열을 동시에 보여줬다는 평가도 나온다. 보리치는 최저임금 인상과 대대적인 사적 연금 개편, 의료 시스템 정비, 국영 리튬 회사의 설립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우파 연합 기독사회전선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56)는 기성정치권에 대한 비판, 불법 이민에 대한 강경한 태도 등으로 정치 아웃사이더에서 대선주자로까지 발돋움했다. 피노체트 시절의 경제 성과에 대한 긍정평가도 했다. 아옌데와 피노체트의 대리전처럼 벌어진 선거였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카스트 지지자인 아우로라 오비에도(68)는 “난 아옌데 정권도 경험했는데 매우 혼란스러웠다. 먹을 것도 없고 뭐든 구하려면 줄 서서 기다려야 했다”고 말했다. 반면 미레야 가르시아(65)는 “쿠데타는 우리 가족을 완전히 파괴했다”며 “이번 선거는 칠레를 위험에 빠뜨릴 극우와 젊은 층을 대변할 후보의 대결”이라고 말했다. 50년의 세월 동안 더욱 깊어진 분열의 골은 보리치 대통령이 해결해야 할 숙제다. 하지만 개헌과 함께 칠레 역사의 한 페이지가 매듭지어진 것만큼은 분명해보인다.

<박은하 국제부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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