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글자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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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강력해지는 K컬처… 자막의 장벽도 무너뜨려

올해도 ‘K’ 열풍은 이어졌다. 코리아를 뜻하는 ‘K’라는 글자 뒤에 한국이 두각을 드러낸 분야나 현상의 이름을 붙이는 ‘K○○’라는 표현은 시간이 갈수록 생명력을 더해가고 있다. 대표적인 ‘K문화’의 선두주자인 K팝, 그중에서도 BTS가 앨범 <LOVE YOURSELF 轉 ‘Tear’>로 빌보드 200 차트 1위에 오른 시점이 2018년 6월이었다. 아시아 출신 그룹의 앨범으로는 처음으로 달성한 위업이다. 당시만 해도 이들이 전 세계 대중문화의 본고장 미국에서 일군 성취를 여러 번 재연할 수 있으리라고 쉽게 짐작하긴 어려웠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오징어 게임과 함께하는 뉴욕 속 한국여행’ 행사 참가자들이 딱지치기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오징어 게임과 함께하는 뉴욕 속 한국여행’ 행사 참가자들이 딱지치기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러나 예상은 기분 좋게 빗나갔다. BTS는 첫 빌보드 200 1위 등극 이후에도 4장의 앨범을 더 차트 1위 자리에 올렸다. 2020년에는 빌보드의 가장 메인 차트인 Hot 100에 디지털 싱글 ‘다이너마이트(Dynamite)’를 3주간 1위에 올려놨다. BTS의 빌보드 석권은 K팝의 전성기가 도래했다는 것을 해외 팬과 전문가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켰다. 이제 더 이상 ‘두 유 노우(Do you know) ○○?’이란 표현이 필요 없는 시기에 접어든 것이다. 세계무대에서 잘 나가는 스타나 콘텐츠를 들먹이며 그들이 한국 출신인데 알고 있냐고 물으며 ‘국뽕’ 섞인 자부심에 취할 시대는 저물었다는 신호다. 영국 옥스퍼드영어사전은 아예 ‘한류(hallyu)’라는 단어를 신조어로 등재했다.

올해의 ‘K’ 열풍은 더 강력하고 광범위했다. BTS는 지난 5월 발표한 ‘Butter’라는 신곡으로 단일 그룹으로선 최장 기간 동안 빌보드 Hot 100 1위로 데뷔한 기록을 세웠다. 이어 후속곡 2곡도 같은 차트 1위에 올려놓으며 기염을 토했다.

<오징어게임> 세계적인 열풍

BTS만이 한국발 ‘K’ 열풍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다. 영화 <기생충>이 칸영화제와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쓴 2019년과 2020년에 이어 2021년은 드라마가 세계적인 흐름을 선도하는 모습을 보여준 원년이 됐다. 지난 9월 17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게임>은 연말을 코앞에 둔 현재까지도 10위권 안에 머무르며 석달이 넘는 장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전 세계 순위 1위를 유지한 기간만 봐도 지난 9월 23일부터 11월 7일까지 연속 46일을 기록했다. 넷플릭스 사상 최장 1위 기록이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순위 집계 차트인 ‘플릭스 패트롤’ 집계를 보면 <오징어게임>은 넷플릭스가 정식 서비스되는 83개국 모두에서 한 번씩은 정상을 차지한 최초의 작품이 됐다. 이 드라마를 시청한 구독자 수만 1억4200만가구를 넘겼다.

기념비적인 기록 뒤에는 수상의 영예가 따른다. <오징어게임>은 아카데미 시상식과 함께 미국의 양대 영화 시상식으로 꼽히는 골든글로브에 한국 드라마로는 최초로 TV드라마 작품상, 남우주연상(이정재), 남우조연상(오영수) 3개 부문 후보로 지명됐다. 이미 11월에는 미국의 독립영화 시상식인 고섬 어워즈에서 최우수 장편 시리즈 상을 받았고, 미국영화연구소(AFI)가 선정한 TV 프로그램 부문 특별상도 받았다.

<오징어게임>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 작품 속 서바이벌 게임 종목의 하나로 등장한 딱지치기나 구슬치기, 달고나 뽑기 등은 세계 곳곳에서 같은 형태로 재현됐다. 참가자들이 입은 녹색 체육복과 진행요원들이 입은 분홍 유니폼 역시 핼러윈 파티용 분장으로 인기를 끌었다.

<오징어게임>은 자막에 익숙지 않은 문화권의 시청자들도 자막에 개의치 않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토양을 확산시켰다는 평가도 받았다. 앞서 2020년 봉준호 감독은 영화 <기생충>으로 오스카상 4관왕을 달성하면서 “1인치 자막의 장벽이 무너졌다”는 수상 소감을 밝혔다. <오징어게임>을 연출한 황동혁 감독은 “많은 사람이 더빙 버전이 아니라 자막으로 봤다고 해줘 기뻤다”며 “봉 감독이 말한 1인치 자막의 장벽이 드디어 무너진 것 같다”고 말했다.

<오징어게임>에 이어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무대에 데뷔한 연상호 감독의 <지옥>도 한국 드라마의 흥행가도를 이어갔다. 11월 19일 공개된 이 작품은 ‘플릭스 패트롤’ 집계에서 하루 만에 세계 1위에 오를 정도로 빠른 호응을 이끌어냈다. 한차례 1위 자리를 놓치기도 했지만 이후 공개 10일째까지 연속으로 1위를 유지하는 저력을 보이면서 단순히 <오징어게임>의 후광으로 주목받은 작품이 아님을 입증했다.

11월 2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마이크로소프트 시어터에서 열린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시상식 무대에서 ‘아티스트 오브 더 이어’(Artist Of The Year) 부문을 수상한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공연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11월 2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마이크로소프트 시어터에서 열린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시상식 무대에서 ‘아티스트 오브 더 이어’(Artist Of The Year) 부문을 수상한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공연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BTS가 대유행 선도

<오징어게임> 이전에도 영화 <#살아있다>가 지난해 9월 한국 콘텐츠로서는 최초로 넷플릭스 전 세계 1위에 올랐다. 올 들어선 지난 2월 공개된 <승리호>가 세계 1위 자리에 올랐다. 이들 작품 외에도 <D.P.>와 <마이네임>, <갯마을 차차차> 등 다양한 장르의 한국 드라마가 선전하면서 한국 영상 콘텐츠의 위력이 찻잔 속 돌풍에 그치지 않을 것임을 증명했다. 특히 이전까지는 아시아권에서만 주로 머물던 ‘한류’가 넷플릭스를 통해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했다는 점은 올해 ‘K드라마’가 보여준 또 다른 특징이다.

기존의 지상파나 케이블방송국이 아닌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이 한국 드라마의 세계적 성공 요인이 됐다는 점은 반박하기 힘들다. 조현래 한국콘텐츠진흥원장은 <오징어게임>의 성공과 관련, “‘주말 연속극처럼 방영했으면 흥행을 끌 수 있었을까’, ‘몰아보기가 가능해 그런 콘텐츠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며 “지상파 방송만 있는 시대에서는 절대 틀 수 없는 것으로 인력과 인프라, 돈 등 3가지 문제가 종합적으로 가야 나올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한 국내 OTT 업체 관계자는 “지상파·케이블·IPTV에 묶여 있는 드라마 환경이 조금만 더 큰 변화를 맞으면 한국과 세계 시장에 모두 영향이 나타날 것”이라며 “올해는 그런 흐름이 가장 여실히 입증된 해”라고 말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중 한국 작품이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디즈니플러스 등 여러 글로벌 OTT 기업들도 앞다퉈 한국 드라마에 대한 투자 확대에 나서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오징어게임>과 <지옥>에 이어 오는 24일 공개하는 <고요의 바다>가 대대적인 흥행을 이어갈지 이목이 집중된다. 신예 최항용 감독이 연출을 맡고 공유와 배두나가 출연하는 이 작품은 배우 정우성이 제작에 나선 작품이기도 하다. 폐쇄된 달기지를 향해 특수 임무를 수행하러 떠나는 대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이 <승리호>에 이어 한국식 SF 시리즈의 흥행 공식을 다시 쓸지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한국산 콘텐츠가 넷플릭스에 크게 의존하는 유통 현실은 결국 한계에 접할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감독과 작가, 배우, 스태프뿐 아니라 창작에 참여하는 관련 업계 전반이 현재의 ‘K드라마’ 특수를 타고 세계 각국의 제작사로부터 더 높은 대우를 받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오징어게임>처럼 글로벌 ‘대박’을 터뜨린 결과가 넷플릭스에 편중돼 들어가는 구조를 두고 근본적인 대책을 고민해봐야 한다는 우려도 있다. 완성된 작품과 지식재산권(IP)으로 거두는 수익 중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넷플릭스가 가져간다.

“자국중심주의 위험 경계해야”

“우선은 전에 없던 막대한 자금줄이 생긴 셈이니까 든든한 투자자를 최대한 활용해 작품의 완성도부터 높이는 것이 첫 번째 전략이다. 일단은 성공해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까.” 한 제작사 대표는 <오징어게임> 제작사가 200억원을 훌쩍 넘는 제작비를 받았지만 넷플릭스는 그보다 1000배를 넘는 이익을 회수했다는 분석에 대해 이처럼 말했다. “언젠가 글로벌 OTT 업체들과 국내 제작사들이 더 이상 ‘윈윈’할 수 없는 시점도 올 테니 그동안 작품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고 본다.”

‘K’로 대표되는 한류의 유행이 장기적인 방향성을 설정해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한국만이 구현해낼 수 있는 세계인의 보편적 감정을 바탕으로 공감대를 이끌어내되 자칫 자국 문화의 우수성에만 도취되는 흐름은 제어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홍석경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세계화와 디지털 문화 시대에 로컬의 한계를 넘어 세계 속에 매력적 존재로 영향을 미치는 일은 시각적으로 드러난 요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문화가 구현하고 있는 가치를 통해서 가능하다”며 “한류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발생하는 자국중심주의의 위험에 대해 늘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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