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하디-바인베르크 평형, 그리고 한국의 진화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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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에 영국의 한 대학강사가 쓴 책이 한글로 번역되면서 국내에도 과학교양서 시장이 열렸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저술한 리처드 도킨스는 <눈먼 시계공>이라는 후속작으로 ‘과학 대 종교’ 논쟁을 촉발했고, 이후 진화생물학 관련 도서들이 우후죽순처럼 번역됐다. 진화생물학자가 되고 싶었던 나도 당시 대학 도서관에서 도킨스를 비롯해 에드워드 윌슨, 스티븐 제이 굴드, 조지 윌리엄스, 에른스트 마이어 등의 책을 읽으며 꿈을 키웠다. 하지만 곧 현실을 마주하고 좌절해야만 했다. 국내에 진화생물학을 전공할 수 있는 대학원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윌슨의 제자인 최재천 교수가 막 서울대에 실험실을 꾸렸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다.

수능 과학탐구영역 생명과학II 20번 문항에 오류가 있다는 내용의 행정소송 첫 변론기일인 12월 10일 서울 서초구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학생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수능 과학탐구영역 생명과학II 20번 문항에 오류가 있다는 내용의 행정소송 첫 변론기일인 12월 10일 서울 서초구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학생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하디-바인베르크 평형은 진화생물학에서 뉴턴 고전역학의 운동법칙처럼 여겨지는 방정식이다. 1908년 케임브리지의 유전학 교수였던 레지널드 퍼넷은 친구인 수학자 하디에게 통계학자 율의 질문을 알려줬다. 우성인 형질이 3:1의 확률로 나타난다면 열성 형질은 언젠가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데, 왜 그렇지 않느냐가 질문의 요지였다. 하디는 중학생이면 모두가 아는 ‘(A+a)2=A2+2Aa+a2’라는 방정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버렸다. 퍼넷은 이 법칙을 논문으로 출판하라고 다그쳤지만, 정수론의 전문가였던 하디는 이렇게 쉬운 문제를 왜 출판하느냐며 거절했다. 결국 퍼넷의 독촉으로 하디의 방정식은 1908년 사이언스지에 한장짜리 서신으로 출판된다.

수능에 등장한 진화생물학

논문의 서두에서 하디는 자신이 유전학과 진화생물학의 전문가가 아님을 밝히고, 친구 퍼넷과 율의 서신을 우연히 알게 돼 논문을 쓰게 됐음을 기술한 후, 형질의 유전법칙을 유전자 빈도수의 평형으로 설명해낸다. 물론 대부분의 수학법칙이 그렇듯, 하디의 평형법칙도 무작위 교배, 매우 큰 집단, 돌연변이가 없는 환경, 집단 간의 유전자 흐름이 없음, 자연선택이 작용하지 않음 등을 만족하는 이상적 집단을 가정한다. 독일의 바인베르크는 하디와 비슷한 시기에 동일한 법칙을 발표했지만, 독일어로 쓴 논문은 35년간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가 훗날 독일의 과학자 슈테른에 의해 복권돼 지금처럼 하디-바인베르크 법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수능 생명과학II에 등장한 하디-바인베르크 평형은 문제 자체의 오류로 법정에 섰다. 집단유전학의 세계 최고 석학인 조너선 프리처드는 그의 트위터에서 이 문제를 자신의 연구실 연구원들에게 과제로 주었다고 밝히고, 한국 수능에 출제된 이 문제야말로 “집단 유전학, 중대한 대학시험, 수학적 모순, 법원의 가처분명령”이라는 흥미 있는 요소를 모두 갖춘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문제의 어려움에 혀를 내둘렀다. 갈수록 떨어지는 수능 변별력을 어떻게라도 유지하기 위해 집단유전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조차 버거워하는 이런 문제를 낸 교육 당국의 처지도 안타깝지만, 그런 문제조차 잘못 출제했으면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발 빼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답변도 어이 없다. 다행히 법원은 해당 문제의 정답을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다.

요즘 고등학생들이 진화생물학의 기본법칙을 이른 시기에 배운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2012년 한국사회는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 흔히 교진추라 불리는 단체가 제기한 고교 과학교과서의 ‘시조새’ 삭제 청원으로 시끄러웠다. 교진추의 청원 사건 이후, 한림원은 진화론 교육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논란을 마무리했지만, 교진추는 여전히 과학교과서에서 창조론과 배치되는 이론들을 개정하기 위한 청원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런 운동의 중심에 놓여 있는 창조과학회는 여전히 진화론 세계관이 유물주의에 근거한 약육강식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개신교를 종교로 가진 청소년이 의지와 상관없이 창조과학회의 주장에 노출돼 있다.

심지어 한국 과학의 메카로 불리는 카이스트에는 창조과학관이 세워졌고, 카이스트의 여러 교수와 기독교인 교수들의 동참으로 창조과학회가 어마어마한 위세를 갖게 된 것은 사실이다. 박근혜 정부는 창조과학자 장순흥을 교육과학 분야 인수위원장으로 임명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창조과학자 박성진 교수를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로 올렸다가 지명을 철회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에서 수능 문제풀이용으로 진화생물학을 배운 학생 중에서, 대학에 진학해 진화생물학을 전공할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 심지어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국내에서 진화생물학자가 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몇몇 대학의 생물학 전공 교수 중에 진화생물학을 연구하는 교수들은 있다. 하지만 국내총생산 대비 연구개발비 1위를 자랑하는 한국의 대학과 연구소 중에 진화생물학만을 연구주제로 삼는 곳이 없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하버드엔 유기체와 진화생물학과가 있고, 도쿄대학의 생물학과는 대부분 진화생물학과 집단유전학 전공교수로 채워져 있으며, 중국과학원 내의 동물 진화와 유전센터 내에만 50명이 넘는 교수가 포진하고 있고,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엔 아예 진화생물학 연구소가 따로 설립돼 있다. 국립 서울대의 생명과학과에서 진화생물학으로 분류되는 교수는 5명뿐이다. 한국엔 진화생물학회도 없다.

과학자는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수능 문제가 불거지자 서울대 의대에서 유전체의학을 연구하는 김종일 소장이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학회는 괜한 논란에 휩쓸리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의견이 더 많아 공식적인 의견을 밝히지 못했다면서, 학회의 이런 결정이 혹시라도 ‘문제에 오류가 없다’는 의견 표명으로 받아들여질까 두렵고, 한국의 전문가 중에서 적어도 한명은 이 문제의 오류를 지적했음을 기록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밝혔다.

그는 제시문에 큰 오류가 있으며, 문제풀이 과정에는 문제가 없다는 평가원의 판단도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그는 문제의 모순을 발견한 학생들에게 입을 닫으라는 평가원의 무책임함을 지적하고, 이를 그대로 내버려둘 경우 “우리 어른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심어주는 불신감은, 수학능력시험 성적을 다시 매기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손해를 우리 사회에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진화생물학 연구자로 유명한 대중적 과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코멘트도 하지 않았다. 진화생물학 교육에 논란이 생겼을 때, 학자로서 정명을 실천한 이는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의과대학의 진화생물학자였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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