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스무 살이었다 아이가. 지금 그리 하라면 몬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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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세상에서 나만 각다분하고 주변 사람들은 편하게 앉아 공부만 하는 듯 보였다. 우리는 당시 감정을 ‘직장인 사춘기’라 부르기로 했다. 직장인 사춘기는 꽤 오랜 기간, 꽤 최근까지 초등학교 동창인 은주를 괴롭혔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그때도 여름이었다. 꿈보다 현실이 좀더 가까웠던 스무 살. 친구들 모두가 방학을 맞아 각자 나름의 자유를 누릴 무렵,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마산공단에 발을 디뎠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그저 별난 풍경이었던 공장은 그때부터 삶의 일부가 됐다. 모든 게 낯설고 두렵던 노키아 공장 앞에서 하얀색 방진복 입은 사람들의 행렬 속에서 날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 쭈뼛대며 사방을 두리번대던 내게 초등학교 동창인 이은주가 말을 걸어왔다. 덕분에 첫 직장생활은 제법 청춘의 맛이 깃든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다2021년 7월 말, 청년의 막바지에서 재회한 은주는 겉으로 보기에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깡마른 몸에 날카로웠던 인상은 둥글둥글해졌고 드셌던 미소에선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해가 아직 산 아래까지 끌려가지 않아 하늘이 온통 새빨간 저녁 6시, 커피와 맥주를 파는 펍에서 대화를 시작했다. 최근 넉 달간 벌어진 일이다. 언론사에 글을 쓰고, 방송에 나온 이야기를 하자 은주는 무척 신기해했다. 나 역시 말하면서도 어째 허풍을 떠는 듯해 머쓱했다. 공장 하청노동자의 어려움을 말하다가 자연스레 노키아 하청 시절 이야기로 넘어갔다. 은주는 킥킥 웃으며 맥주잔을 들었다.

“참 살기 힘드네”란 말 자주 내뱉어

“노키아, 참 좋았는데.” 은주는 노키아에 입사하기 전까지 2년 가까운 긴 방황을 했다. 생활보장지원금을 받으며 하루종일 리니지만 하는 무기력한 아버지와 칭얼거리는 초등학생 남동생 꼴 보기 싫어 고1 때 자퇴하고 가출했다. ‘싸이월드’로 같은 지역 비슷한 처지의 또래들을 찾아 모텔족이 됐다. 최저시급 2500원 받아가면서 편의점과 PC방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려 보이지 않으려 몸에 피어싱을 하고 머리도 탈색했다. 입에 잘 달라붙지도 않는 담배와 술, 욕설을 배웠다.

하루하루를 제멋대로 살았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게 된 건 동생의 문자 때문이었다. 어찌어찌 휴대전화번호를 알아내서는 사정을 호소한 것이었다. 6학년인 동생은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한 뒤 빈집에서 혼자 등·하교를 하고 있었다. 사회에선 불량의 낙인을 찍고, 친구들도 하나씩 멀어져가던 가운데 가족까지 잃을 수 없었던 은주는 모텔에서 나와 귀가했다. 그날부터 소녀 가장의 삶이 시작됐다.

2009년 1월 2일, 성인이 되자마자 바로 노키아 하청에 전화를 걸었다. 당시 핀란드 본사에서 마산공장에 엄청나게 투자를 해댔고, 주야 맞교대를 돌려도 물량을 못 맞춰 구인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친구들이 교복 벗을 날을 앞두고 있을 때, 혼자 하얀 방진복을 입게 된 은주는 하청 소속으로 첫 공정에 들어섰다.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조립 작업이었다. 서서 일하는 고통이야 알바 짬밥이 있어 그럭저럭 견뎌냈지만, 부품을 핀셋으로 집어야 하는 기종이 문제였다. 시력이 나쁜 탓에 안경을 사기 전 첫 한 달은 눈에 힘 빡 주고 일해야만 했다. 가뜩에 드센 인상에다가 미간은 목이버섯처럼 쭈글쭈글해져 있으니, 입사 초기엔 직장 동료들이 잘 다가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전 9시에 일 시작하고 밤 9시에 퇴근이었다. 격주 교대 근무, 월 초과근로 92시간의 살벌한 스케줄을 버텨내고 받은 첫 월급은 170만원. 편의점과 PC방 투잡으로 고작 60만원씩 벌던 은주에겐 거액이었다. 안경을 사고, 동생 교복과 책가방을 사주는 평범한 삶이 너무 낯설고 새로워 힘든지도 몰랐다. 내가 첫 직장에서 한창 어리바리할 때, 은주는 어느 공정을 가도 제 몫을 다 하는 선수가 돼 있었다. 교대 주기가 같아 쉬는 시간과 점심 때마다 은주와 마주치곤 했다. 당시 기억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잔업 전 쉬는 시간인 새벽 5시 30분, 해가 부지런한 여름철이라 밤이 새는 과정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간식으로 나온 우유와 빵을 먹는 동안 은주는 옆에서 담배를 피우며 멍하니 하늘만 보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우린 고작 술·담배를 합법으로 살 수 있었을 뿐인데, 무슨 ‘어른뽕’이 들었는지 “세상 참 살기 힘드네”라는 말을 자주 내뱉곤 했다. 당시 기억을 이야기하자 은주는 한참을 웃더니 말했다.

“좋을 때였네. 좋을 때였어.”

“그런데 우리 그때 진짜 어찌 그리 몸 안 사리고 일했나 몰라.”

“스무 살이었다 아이가. 지금 그리 하라면 몬 하겠다.”

간절할 때 취업에 성공한 이들은 잘 알 터이다. 통장에 첫 월급이 꽂혔을 때의 쾌감은 길게 남아 있지 않다. 나와 은주 같은 흙수저들에겐 그 시기가 더더욱 빨리 찾아온다. 땀 흘려 번 월급의 액수는 한없이 초라했다. 청춘이 일터에서 푼돈에 팔려 나가는 동안 다른 친구들은 낭만 가득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들 ‘힘듦’의 기준 도무지 공감 안 돼

비교는 일상에서부터 치고 들어온다. 특히 야간에 잔업 마치고 퇴근길이 고비였다. 버스정류장을 지나면 전공 책 안고 시시덕대는 동갑내기들의 모습이 보였다. 대학생 아니면 스무 살의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친구들과 만나도 대화가 어긋나는 걸 느낀다. 여가시간이 거의 없는 삶이라 드라마나 영화 이야기에 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동갑들이 호소하는 ‘힘듦’의 기준에 도무지 공감이 가질 않았다. 당장 먹고 입을 게 없어 일터에서 죽살이치는 삶을 살다 보면, “하다 하다 안 되면 공무원이나 하지 뭐”라는 친구들의 모습이 참으로 철없게만 보였다. 세상에 나만 각다분하고 주변 사람들은 편하게 앉아 공부만 하는 듯 보이던 그때, 우리는 당시의 감정을 ‘직장인 사춘기’라 부르기로 했다. 직장인 사춘기는 꽤 오랜 기간, 꽤 최근까지 은주를 괴롭혔다.

곪아가는 마음과는 달리 직장생활은 줄곧 순항이었다. 휴대전화 조립은 라인 작업이 아니라 셀에서 4명끼리 진행하는 협업이라 대인관계 관리가 무척 중요했다. 특히 ‘반장 언니’들의 권한이 막강했기에 이분들과 친하게 지내야만 했다. 반장 언니들은 40대 후반에서 50대 여성이었기에 그 연령대에 걸맞은 공감이 필요했다. 얼굴도 모르는 자식들의 이름을 알고 안부를 묻는 건 기본이요. 빅뱅과 2NE1의 멤버 얼굴도 몰랐지만, 윤수일씨와 박혜성씨 노래는 알아야 했다. 다년간의 알바로 다져진 처세에 바지런하고 일처리도 깨끔하니 애초에 미움받을 수가 없었다. 보통 조립 작업자가 다른 일에 눈독 들이면 ‘네 일이나 잘해’라는 반응이 돌아오기 일쑤였는데 은주는 예외였다. 덕분에 단순한 조립을 넘어 불량 수정을 하는 방법도 배우고, 납땜하는 방법도 배워가면서 2년 가까이 ‘공순이’로 살았다. 노력은 곧 결실을 맺어 마침내 2010년 10월. 하청노동자 정규직 전환자 명단에 은주의 이름이 포함됐다. 그때만 해도 모든 삶이 순탄하게 풀릴 줄 알았다.

<천현우 용접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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