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떠보니 오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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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과에 갔습니다. 딱히 몸에 이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나이가 나이다 보니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고 싶었습니다. 결과를 살펴보던 의사선생님. “대장이 문제가 아니네요. 혈압부터 잡아야 해요.”

[편집실에서]눈 떠보니 오십

몇해 전부터 혈압이 슬금슬금 높아지더군요. 가족력도 없는데 고혈압이라니. “살 빼라”는 고언을 받았지만 무시했습니다. 생활습관을 바꾸기가 어디 쉽나요. 마감에 쫓기다 보면 어느새 입은 뭐든 자극적인 것을 넣어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커피믹스도 스낵도 들이부었습니다. 그러니 살이 빠질 리가 있나요.

말없이 의사가 주는 약을 받아들었습니다. 의사가 덧붙입니다. “술은 진짜 독이에요.”

사실 그날 저녁 간만에 약속이 있었습니다. 돼지갈비에 소주가 나오는 자리였습니다. 의사 말이 잠시 떠올랐지만, “괜찮겠지” 하며 들이켰습니다. 호기로웠던 것도 잠시, 갑자기 손끝이 가려운 겁니다. 이어 발끝이, 그리고 목덜미가 가렵더니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얼굴이 벌개지자 곁에 있던 지인이 깜짝 놀라며 “이거 급성 알레르기 같다”며 약국으로 달려갔습니다. 약을 먹은 지 20분쯤 지나니 가려움이 사라지고, 숨도 편하게 쉴 수 있었습니다. 지인 말로는 그냥 방치했다면 호흡곤란으로 응급실 신세를 져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당장 술을 끊기로 했습니다. 마감하고 맥주 한잔 마시는 게 낙이었는데. 인생 쾌락의 절반쯤 날아가버린 듯한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슬픈 일은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며칠 뒤 동문 선배와 만났습니다. 코로나19가 퍼진 뒤 처음 마련한 자리라 거부하기가 그렇더군요. 삼겹살이 앞에 놓이자 그가 소주잔을 건넸습니다. 망설이다 어렵사리 말씀을 드렸습니다. “당분간 술을 못 마십니다.” 저는 선배가 “무슨 소리 하냐. 한잔만 하라”며 강권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술잔을 거두더니 한말씀합니다. “그래, 건강이 젤 중요하지.” 어라? 내심 섭섭하더군요. 한번쯤은 빈말이라도 “그래도 한잔하라”며 들이밀 줄 알았거든요. 과거 어금니를 뺀 날도 “원래 알코올로 소독하는 거다”며 술잔을 내밀던 상남자였거든요.

그다음 날 동기와 점심을 먹는데 맥주를 한잔 시키잡니다. “술을 못 마신다”고 하니 “물이 제일 좋긴 해”라며 망설임 없이 물러섭니다.

그제야 알겠더군요. 제 나이 또래는 이게 일반적이라는 것을요. 말을 안 해 그렇지 그들도 어딘가는 안 좋은 데가 있고, 술·담배 끊으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을 겁니다. 건강을 챙기는 것은 부모님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 얘기가 된 지 오래였더군요. X세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생, 1990년대 학번도 그렇게 나이가 들어갑니다. 눈 떠보니 오십이라는 얘기, 맞네요.

<박병률 편집장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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