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이념 없는 정치’가 세운 대선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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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됐다. 그의 발언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지지 혹은 분노를 쏟아낸다. 나는 이 상황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가 없다. 비극적 결말에 이른 영화 속 주인공이 마지막 순간에 자문하듯이, 당혹스러운 질문만 머릿속을 맴돌 뿐이다. 한국정치는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지난 11월 10일 오후 광주 북구 5·18 민주묘지를 찾아 참배를 하려 했지만 광주지역시민단체의 항의에 막혀 묘역 근처에서 묵념 후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지난 11월 10일 오후 광주 북구 5·18 민주묘지를 찾아 참배를 하려 했지만 광주지역시민단체의 항의에 막혀 묘역 근처에서 묵념 후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결정했던 순간,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됐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누군가는 현 정부의 성공을 기원했고 누군가는 실패를 예견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른바 ‘촛불정부’의 검찰총장이 이명박·박근혜 사면을 약속하는 대선후보가 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더구나 대선후보 윤석열이 탄생하는 과정은 역사의 비극적 우연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자들의 ‘거대한 헛발질’이 만들어낸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물론 그 코미디에는 나름의 이유와 배경이 있다.

이념 없는 민주주의는 없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개념을 빌자면, 정치적 공간은 다수의 ‘집단적 의지’가 서로 충돌하고 경쟁하는 장이다. 여러 개인의 의지를 하나의 집단적 의지로 결집하려면 매개 역할을 할 구심점이 필요한데, 근대 정치에서 그것은 ‘이념(이데올로기)’이라는 형태로 존재해왔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보수주의, 공산주의, 내셔널리즘, 공화주의 따위의 개념이 근대의 다양한 정치이념을 표현한다. 이념의 스펙트럼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해왔지만, 어떤 이념이든 앞에서 나열한 유형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 이유는 근대 민주주의 자체에 있다. 모든 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동일한 원리에 기초하지만, 자유와 평등의 관계,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사회와 국가의 관계 등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규정할지는 선택의 문제다. 선택지는 다양하지만 그렇다고 무한히 많은 것도 아니다. 지난 두 세기의 근대 역사는 정치적 이념의 선택지를 몇가지로 축약했고, 그 결과 우리에게 익숙한 이념의 목록이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이념이라는 말은 고리타분한 것으로 취급되지만 현대정치의 역학관계는 이념에 의해 규정된다. 좌파와 우파, 리버럴과 보수의 구별은 예전처럼 결정적이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서구 정당정치의 기본질서를 구성한다. 전통적인 이념적 쟁점, 예컨대 국가와 시장의 관계, 사회서비스의 작동 방식, 이민자 문제, 임신중단 등에 대한 입장은 정당 정체성을 드러내는 핵심 지표다. 지금 세계는 포퓰리즘, 팬데믹, 기후위기같이 기존의 이념적 차이를 약화시키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지만, 그것이 요구하는 바는 이념의 종말이 아니라 강화 혹은 전환이다. 애초에 이념 없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실행 모델과 구체적 작동 방식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이념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는 이념 없는 정치다. 이념을 대체하는 것은 사람이다. 흔히 목격하는 정치현상 중 다수가 이런 특성에서 비롯한다. 현 정당질서는 거대양당의 대립구도로 요약되는데, 이는 좌파와 우파, 리버럴과 보수의 대립하고는 전혀 다르다. 흔히 민주당을 ‘진보’, 국민의힘을 ‘보수’라고 말하지만 이는 정치이념이 아닌 특정 인간집단을 부르는 고유명사일 뿐이다. 그들을 구별하는 것은 민주화 운동과 군사독재라는 역사적 경험이고 거기서 현재의 이념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민주화 운동의 후예들이 노태우 국가장을 추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감정이 좌우하는 한국 정치

한국 정치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개인의 성격과 인생사다. 시민은 정책과 비전 대신 그 인간 자체를 지지와 반대 대상으로 삼는다. 정치인 지지 모임이 항상 팬클럽 형식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환경에서 집단적 의지는 대부분 정치인에 대한 사랑 혹은 미움에 따라 형성되고 집단적 감정을 관리하는 기술이 정치역량의 핵심이 된다. ‘진영논리’와 ‘내로남불’은 이러한 정치의 본질적 특성이다. 정치이념은 윤리기준이자 행위규칙인데, 그것이 없으니 무엇이 좋고 나쁜지 판단할 수도, 행위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도 없다. 오로지 정치인에 대한 찬반으로 나뉜 ‘우리’와 ‘그들’의 대립만 존재하고, ‘우리가 선이고 그들은 악이다’란 규칙이 나올 뿐이다.

2017년 이후 박근혜 주변 세력의 몰락은 이념 없는 정치의 특성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진보와 보수가 갈등하지 않아도 시민은 극렬히 싸운다. 그들의 집단적 의지를 지배하는 것은 사랑과 미움의 논리다. 그나마 약간의 이념적 색채가 남아 있던 ‘진보’와 ‘보수’ 대신 ‘검찰개혁’과 ‘공정’이 새로운 정치언어로 등장했다. 이 언어의 유일한 기능은 누구를 지키고 공격할 것인지 밝히는 것이다. 조국과 검찰의 대립은 마치 거대한 정치적 치정극을 닮았다. 사랑하던 자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 믿었던 자에 대한 배신감 따위가 뒤엉켜 새로운 정치적 지형을 만들어냈다. 그런 감정의 논리에 참여할 생각이 없는 시민은 정치 참여의 장에서 배제된다.

최근 ‘정권교체’라는 집단적 의지는 윤석열을 대선후보로 택했다. 그는 현 정부의 검찰총장 출신이고, 그의 정치적 이념이나 지향은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이런 사실은 중요치 않다. 이념 없는 정치에서 시민의 요구는 결국 ‘내가 싫어하는 인물과 집단을 제거하는 것’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우연한 일련의 사건들에 의해 윤석열을 증오하는 집단적 의지가 형성됐고, 윤석열은 그들의 증오 덕분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 됐다. 정권교체를 원하는 이들의 마음이 그를 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번 대선은 현 정권을 싫어하는 의지와 윤석열을 싫어하는 의지가 충돌하는 장이 됐고, 아마 앞으로도 집단적 감정이 한국 정치를 좌우할 것이다. 이제는 기존 정치질서를 뒤집을 때가 아닐까. 이는 제도의 개선이나 권력구조의 재편이 아니라 문화적 전복을 요구한다. 개인의 마음과 집단적 의지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과제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상상하는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그마저 없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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