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 이종범 뒤에 이정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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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일 잠실야구장에서 두산과 키움의 와일드카드 2차전이 열렸다. 3루 쪽 히어로즈 관중석의 한 팬이 들고 있는 손팻말이 중계화면에 잡혔다.

“너희는 이정후 없지? 우리는 이정후 있다.”

지난 11월 1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2021 KBO리그 포스트시즌 와일드카드전 1차전 키움 히어로즈와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키움 이정후가 9회초 2타점 2루타를 친 뒤 환호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지난 11월 1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2021 KBO리그 포스트시즌 와일드카드전 1차전 키움 히어로즈와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키움 이정후가 9회초 2타점 2루타를 친 뒤 환호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히어로즈는 1차전을 7-4로 이겼지만 2차전을 8-16으로 졌다. 이정후(23)는 2경기에서 타율 0.556(9타수 5안타), 5타점으로 펄펄 날았다. 이정후는 팀의 탈락이 눈앞에 다가온 순간에도 온 힘을 끌어모아 안타를 때렸고, 3루 쪽 팬들을 향해 포효했다.

잘 알려진 대로 이정후는 이종범 LG 코치(51)의 아들이다. 한국야구에 이종범이 있었고, 지금 이정후가 있다.

이종범은 해태 타이거즈의 심장이면서 동시에 한국야구의 상징이었다. 김응용 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은 과거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이라는 말을 남겼다. 잘 치고, 잘 뛰고, 잘 잡고, 잘 던졌다. 경기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게임 체인저’였다. 프로야구 데뷔 첫해였던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은 해태한테 진 게 아니라 이종범에게 졌다. 이종범은 7차전을 치르는 동안 타율 0.310으로 활약한 것은 물론 한 경기 3도루와 시리즈 7도루로 삼성 내야를 휘젓고 다녔다. 정규리그 신인왕은 양준혁에게 뺏겼지만, 이종범은 한국시리즈 MVP에 올랐다.

해태 타이거즈의 심장 이종범

이듬해 ‘2년생 징크스’가 무색하게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1994시즌 막판까지 4할 타율을 오르내리던 이종범은 시즌 타율 0.393의 역대 2위 기록을 남겼고, 최다 안타 196개는 2014년 서건창이 201개를 때릴 때까지 역대 최고의 기록이었다. 치고 달리는 이종범은 보는 이를 두근거리게 만드는 타이거즈의 심장이었고, 한국야구의 상징이었다. 일본 진출 뒤 부상 등 시련을 겪었지만 돌아와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일본전에서 보여준 호쾌한 적시 2루타와 세리머니는 여전히 많은 팬의 가슴에 남아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팬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 종범이 형”이라 불렀고, 그보다 조금 뒤 시대를 살았던 팬들은 “종범신(神)”이라고 불렀다. 야구팬 정모씨는 “이종범은 피를 끓게 하는 선수”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길을 따르는 걸 반대했다. 가뜩이나 야구선수의 길이 고단한데, 그 길을 ‘이종범이 아들’로 걷는 것은 더욱 괴로운 일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축구화와 스케이트화도 신겨봤고, 골프채를 손에 쥐여줬지만 결국 야구를 택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결국 어머니 정연희씨가 아들의 손을 잡고 야구부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 아버지 이종범이 스프링캠프 훈련 때문에 집을 떠나 있을 때였다.

‘훈장’이었던 아버지는 야구를 시작하자 ‘낙인’이 됐다. 주변의 모두가 ‘어디 한 번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주전으로 나서면 “누구 아들이라서”라고 흘겼고, 못 치면 “것 봐라” 하며 혀를 찼다. 이정후는 “아빠는 왜 그렇게 야구를 잘해 나를 힘들게 하나 원망한 적은 있었지만, 그래도 울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 시선이 오히려 이정후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고교 시절 밤마다 주차장에서 방망이를 휘둘렀다. 이정후는 휘문고 졸업반이던 2016년 여름, 히어로즈에 1차 지명됐다. 서울 지명권 순위에서 히어로즈에 앞서 있던 LG는 충암고 고우석을 지명했다.

프로 데뷔 첫해 우연이 겹쳐 운명이 됐다. 아버지를 따라 유격수였던 이정후는 프로 입단 뒤 1루 송구 정확도에 문제가 있었다. 사실 고교 시절에도 유격수가 주포지션이라 하기 어려웠다. 휘문고 동기 중에 외야수가 많다 보니 그 친구들을 배려해 유격수를 맡았다. 프로는 수비가 우선인데, 스트레스가 쌓였다. 애리조나 1차 스프링캠프에서 실수가 잦았다. 오키나와 2차 캠프 때 홍원기 당시 수비코치가 “이러다 장점인 공격도 위축되겠다. 외야수를 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이정후는 “그래도 내야를 해보겠다고 했는데, 계속 스트레스가 쌓였다. 속으로는 ‘외야수 한다고 할 걸’ 후회도 했다”고 말했다. 오키나와 캠프 마지막 일본팀과 연습경기 때 부상 때문에 외야수 자리가 비었고, 그 자리를 이정후가 채웠다. “사실 너무 신났다. 방망이도 잘 맞더라”라고 말했다.

2012년 10월 당시 기아 타이거즈 이종범이 은퇴식에서 아들 이정후와 나란히 서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2년 10월 당시 기아 타이거즈 이종범이 은퇴식에서 아들 이정후와 나란히 서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히어로즈 대표타자 이정후

이정후는 시범경기에서 외야수로 출전했고, 12경기에서 타율 0.455를 기록했다. 홍 코치(현 히어로즈 감독)는 이정후에게 “이제 내야 글러브는 버려라”고 말했다. 이정후는 개막 3번째 경기에서 처음으로 중견수로 선발 출전했고, 4번째 경기에서 3타수 3안타를 때렸다. 4월이 끝났을 때 이정후의 타율은 3할6리였다. 시즌이 끝났을 때 타율은 0.324였고, 이정후는 아버지 이종범도 받지 못한 신인왕에 올랐다. 투표인단 107명 중 1위표 98장, 2위표 4장, 3위표 1장을 받았다. 이정후에게 투표하지 않은 ‘4명’이 비난의 대상이 됐을 정도로 압도적인 시즌이었다.

화려한 데뷔 시즌 이후 이정후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뽑혔고, 2019년에는 193안타를 때리며 아버지의 기록(196개) 경신 여부로 팬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궜다.

지난여름 야구 올림픽 대표팀은 ‘도쿄 참사’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이정후는 ‘대표타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일본 출발 전부터 일본 투수 야마모토 요시노부에게 설욕을 다짐했다. 2019년 프리미어12 일본전에서 야마모토에게 3구 삼진을 당했다. 이정후는 “그때 구종도 다 기억난다”고 말했다. 일본과의 조별리그 첫 경기, 일본 내 최고로 평가받는 야마모토의 포크볼을 때려 안타를 치는 등 2안타를 뽑아냈다. 비록 경기는 졌지만 이정후는 세계 최고 선수들과 겨룰 수 있는 수준의 타자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정후는 올림픽이 끝난 뒤 옆구리 근육을 다치는 바람에 잠시 멈춰섰지만 복귀하자마자 맹타를 휘둘렀다. 강백호(KT), 전준우(롯데)와의 타격왕 경쟁에서 앞서며 0.360으로 1위에 올랐다. 아버지 이종범은 1994년 타격왕(0.393)이었다. 미국도, 일본도 없었던 세계 최초 부자 타격왕이 탄생했다.

히어로즈가 치열한 순위 싸움을 이겨내고 가을야구 마지막 티켓(5위)을 따내는 데는 이정후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 이정후는 정규시즌 마지막 7경기에서 타율 0.552를 기록하며 히어로즈 공격을 이끌었다.

가을야구에서 이정후는 또다시 업그레이드됐다. 야구장에 백신패스가 도입되며 모처럼 야구장이 팬들로 들어찼다. 1차전을 앞두고 이정후는 “팬들이 들어찬 데서 야구를 하면 집중 더 잘되는 것 같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에너지가 솟아난다”고 말했다.

가장 결정적인 기회가 왔을 때, 이정후는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렸다. 이정후는 4-4로 맞선 9회초 2사 1·2루에서 타구를 잠실구장 깊은 곳으로 날렸다. 두산 중견수 정수빈이 아무리 뛰어도 잡을 수 없는 곳을 향했다. 2루 베이스 위에 선 이정후는 3루 쪽 히어로즈 팬들을 향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했다. 이전의 이정후에게서 보기 힘들었던 호쾌한 세리머니였다. ‘이게 바로, 야구다’라는 걸 보여줬다. 결승 2타점 2루타를 때린 이정후가 2루 베이스 위에서 보여준 포효는 팬들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을 명장면이었다. 이정후는 9회말 수비에 들어가면서도 3루 쪽 키움팬들의 응원에 호응하는 동작을 보이며 외야 수비를 위해 뛰어갔다. 이정후는 경기 뒤 “팬들 여러분이 육성 응원 금지 규정을 위반하게 만들어 죄송하다”면서도 “소리 지를 수밖에 없는 장면을 만들고 싶었다”며 웃었다.

‘이게 바로, 야구다’

이정후는 2차전에서도 고군분투했다. 승부의 추는 일찌감치 두산으로 기울었지만, 이정후는 9회 1사 1루 마지막 타석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안타를 쳤다. 3루 관중석의 히어로즈 팬들은 타격왕의 올 시즌 마지막 안타에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동안 이정후는 ‘바람의 손자’로 불렸다. 이종범이 ‘바람의 아들’이었고 아들의 아들이니까 ‘손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해마다 성장을 거듭했고, 이제 히어로즈 중심타자가 아니라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가 됐다. 5년째 시즌 가을야구에서 이를 확실히 증명했다.

앞서 “이종범은 피를 끓게 했다”고 말한 야구팬은 이정후에 대해 “보고 있으면 뿌듯하다. 아직 피를 끓게 할 정도는 아니지만 모처럼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타자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정후는 안타와 홈런을 생각하기 전에 앞서 팬들을, 리그를, 야구를 먼저 생각하는 진짜 프로야구 선수가 됐다. 모든 인터뷰마다 “팬 여러분이 야구장을 채워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아쉽게 가을야구가 끝난 다음 날에도 이정후는 인스타그램에 장문의 글을 올렸다.

“정규시즌 마지막 3경기부터 와일드카드 1차전까지는 우리의 힘을 보여준 경기였던 것 같네요. 중간에 부상도 있고 해서, 팬들의 성원이 아니었더라면 돌아와 좋은 성적을 거두긴 힘들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5년째 결과는 매년 같아 팬들한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실력입니다. 그 부족한 실력은 더욱 보완한 다음 내년에 다시 한 번 도전하면 됩니다. 올 한해도 많은 응원 감사드리고 내년에 만나요!”

한국야구에 이종범이 있었고, 이제 우리 모두에게 이정후가 있다.

<이용균 스포츠부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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