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임신중단 금지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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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텍사스주 사실상 임신중단 전면 금지법 시행… 법정 다툼 속 대법원 판단 앞둬

여성의 ‘몸’이 정치권력의 도구로 또다시 소환됐다. 미국 보수 진영의 심장부 격인 텍사스주는 지난 9월부터 임신 6주 이후의 임신중단을 원천 금지하는 법안을 시행했다. 주 정부는 이를 ‘심장박동법(SB8법)’으로 명명했는데, 임신 6주는 여성이 임신 사실을 알기 어려운 시기라 사실상 임신중단을 전면 금지한 법으로 평가받는다. 공화당이 장악한 다른 주들도 임신중단을 대폭 제한하는 법 통과를 잇달아 예고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내년 미국 중간선거를 앞둔 공화당의 보수 결집용 정책”이라고 분석했다. 임신중단권이 정치세력에 의해 뒤흔들리는 역사가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다.

여성 인권 운동가들이 3월 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연례 여성 집회에 참석해 ‘우리 몸에 대한 금지령’이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서 있다. / 게티이미지

여성 인권 운동가들이 3월 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연례 여성 집회에 참석해 ‘우리 몸에 대한 금지령’이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서 있다. / 게티이미지

미국 텍사스주에서는 9월 1일(현지시간) 새벽 0시를 기해 태아의 심장박동이 감지되는 시점 이후로는 성폭행 등에 의한 임신이어도 임신중단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한 법이 시행됐다. 이날 여성들은 “우리의 몸에 대한 금지령(bans off our bodies)”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문제의 텍사스주 법은 임신중단 수술을 시행한 의료기관과 의료진, 임신부의 이동을 도운 우버 기사 등 조력자에게 시민이 소송을 제기해 승소할 경우 1만달러(약 1160만원)를 제공한다. 다수의 클리닉이 처벌을 우려해 임신중단 수술을 중단했고, 여성들은 임신 상태를 이어가도록 강제되거나 다른 주나 국가로의 이동을 감수해야 한다. 미 CNN방송은 “금지령은 특히 유색인종, 농촌 지역 거주자, 경제적 여유가 없는 여성 등에게 불균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며 “다른 주로 이동할 수단이 없는 여성들은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시민단체들은 여당인 민주당이 상위법인 연방법으로 주법에 제동을 걸어 임신중단을 권리로 보장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정치권력 도구’가 된 여성의 권리

미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멕시코에서는 같은 달 7일 대법관 10명의 만장일치로 ‘임신중단 범죄화는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는 여성들에게 자신의 몸과 삶을 결정할 권리를 부여하기 위해 이 같은 판결을 내렸다고 밝혔다. 멕시코 인구의 약 80%가 임신중단에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가톨릭 신자다. 임신중단 합법화를 요구해온 여성단체들은 “역사적인 움직임”이라며 환호했다. 임신중단을 비범죄화하는 움직임은 더디지만 이어지고 있다. 가톨릭 소국 산마리노도 9월 26일 국민투표를 거쳐 임신 12주 이내 임신중단을 합법화했다. 다만 비범죄화가 온전한 임신중단권 보장으로 직결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안전한 임신중단을 위한 의료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사회가 규정한 성 규범과 도덕적 감각 등에 기초해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사유와 시기 등에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임신중단권 보장의 역사는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법원은 7 대 2의 표결로 여성이 태아가 자궁 밖에서 독자 생존할 수 있는 임신 24주 전에는 헌법적으로 임신중단권을 보호받는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각 주의 관련 법도 대부분 임신중단 금지 시점을 20주 안팎으로 정하고 있다. 당시 해리 블랙먼 대법관은 “사람들이 출산에서 자신의 역할을 통제할 권리를 갖는다는 일반적인 원리는 임신중단에도 적용된다”고 판시했다.

다만 이 판결은 임신중단을 제한할지에 대한 판단을 주별 정치에 맡겼다는 한계점도 있었다. 당시 연방대법원은 태아가 헌법상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생명권을 갖고 있지 않지만, 생명의 가치는 지니고 있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이 잠재적인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주의 강력한 이익’을 인정했다. 임신 기간을 3분기로 나눠 임신 중·후기에는 임신중단을 규제할 수 있도록 기본 틀을 설정했다. 하지만 주가 보호하도록 허용하는 종류의 이익은 무엇인지, 왜 그 이익이 태아가 체외생존이 가능한 시점 이후에 더 강력해지는지 등에 대한 설명은 미비했다.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반낙태 로비’가 특정 주에서 충분히 강력하다면, 그 주의 여성은 로 대 웨이드 판결 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임신중단의 기회를 부인당할 것을 의미한다”고 진단했다.

‘강력한 이익’이라는 모호한 개념은 지지층을 끌어모으려는 정치 세력에게 호소력 높은 정치 의제로 구체화됐다. 임신중단권을 둘러싼 논의는 선거 등 주요 국면 때마다 단골 이슈로 등장했다.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1984년 임신중단 관련 단체에 대한 지원을 금지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멕시코시티 룰’로 불리는 이 정책은 정권에 따라 폐지와 부활을 거듭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7년 임신중단 등을 지원하는 국제단체에 연방정부 지원금을 끊는 행정명령에 서명해 이를 되살려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비영리단체 구트마허연구소는 바이든 정부 취임 후 6개월 동안 공화당이 장악한 주의회가 90건의 임신중단 금지 규제를 도입했다고 밝혔다.

국가가 여성을 인구 조절 장치로 대상화해 임신중단권 제한에 나서기도 한다. 중국 정부는 지난 9월 27일 ‘중국부녀발전개요(2021~2030)’를 공개하고 ‘비의료적인 이유’의 임신중단을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임신부의 개인적인 사정 등은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사유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중국 당국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막고, 남성들에게도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도록 장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최근 몇년 사이 급감한 출생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목적이라는 해석이 짙다.

“보편적인 건강권 문제로 다뤄야”

임신중단을 둘러싼 법정 다툼은 갈수록 치열해질 전망이다. 미연방대법원은 텍사스주 법의 효력을 멈춰달라는 가처분 신청에 기각 결정을 내렸다. 이에 법무부가 나서 이 법의 효력을 중단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냈고, 1심 연방법원은 법무부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곧바로 항소법원이 이를 뒤집고 텍사스주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법의 효력은 계속되고 있다. 최종 결론은 법무부의 요청에 따라 대법원으로 넘어가게 됐다. 임신 15주 이후 임신중단을 금지한 미시시피주 법의 위헌 여부도 오는 12월 1일 대법원에서 가려진다. 대법원이 합헌 결정을 내리면 최소 11개주에서 임신중단이 불법이 될 수 있다고 미 일간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CNN방송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보수 6대 진보 3으로 재편되며 보수 우위로 돌아선 대법원이 내년 안에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을 가능성이 크다고 일부 법률 전문가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지난해 임신중단을 합법화한 뉴질랜드 법안의 가장 큰 특징은 임신중단을 범죄가 아닌 건강 문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앤드루 리틀 법무부 장관은 법안이 통과된 뒤 “이제부터 임신중단은 건강문제로 다뤄질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앞서 유엔 인권위 역시 임신부의 ‘생명권’을 보호할 의무의 일환으로 국가가 임신중단 여성이나 의료 서비스 제공자에게 형사 제재를 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대표는 “캐나다의 경우 임신중단을 여성건강권, 안전권의 문제로 다뤘기 때문에 다른 소송들에서도 여성의 건강권에 영향을 미치는지가 기준이 됐다”며 “보건의료 접근성, 평등권을 더 확보하는 방향으로 담론이 이동해야 한다”고 짚었다.

<박하얀 국제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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