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은 사람을 사람으로 본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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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환기 감독이 연출한 다큐 영화 <노회찬 6411>

“한나라당과 민주당,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퇴장하십시오. 50년 동안 썩은 판을 이제 갈아야 합니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고기가 시커메집니다. 판을 갈 때가 이제 왔습니다.”

6411번 버스를 탄 고(故) 노회찬 의원 / 노회찬 재단 제공

6411번 버스를 탄 고(故) 노회찬 의원 / 노회찬 재단 제공

노회찬이란 이름 석자가 시민들에게 알려진 것은 2004년 3월부터다. 17대 총선 직전 열린 방송토론에서 그는 ‘삼겹살 불판론’을 설파해 기성정치에 답답함을 느끼던 이들의 가슴을 뚫어주었다. 그로부터 17년이 흘렀다. 대선이 다가왔건만 거대 양당은 상대 허물이 더 크다며 아귀다툼을 벌이는 데에만 혈안이다. 이들 틈에서 정의당은 “양당체제의 불판을 갈겠다는 초심”을 얘기해보지만, 지지율은 3~4%대를 맴돈다. 원내 첫 진출 때의 성적(2004년 총선 민주노동당 득표율 13%)에 한참 못 미친다.

기성정치의 ‘불판’ 교체가 난망해 보이는 이때 더욱 그리운 이름, 노회찬. 그의 삶을 다룬 첫 다큐멘터리 <노회찬 6411>이 10월 14일 개봉한다. 영화의 제목은 고(故) 노회찬 의원이 2012년 했던 연설에서 따왔다. 이 연설에서 노 의원은 강남에 청소하러 가는 여성 노동자들로 매일 만원인 6411번 새벽 첫차에 대해 얘기했다.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성했다. “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의 손에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여가 흘렀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믿음을 저버리지 못해서 고단한 경로를 택했던 인간 노회찬의 일대기”(민환기 감독)인 이 다큐멘터리는 어쩌면 노회찬을 향한 ‘공적 애도’의 진정한 시작점일지 모른다. 노회찬의 삶을, 노회찬이 돼서 바라볼 때 관객은 생전에 그를 짓눌렀을 중압감과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지난 10월 5일 화상회의 서비스 ‘줌’을 통해 <노회찬 6411>의 민환기 감독과 대화를 했다. “누군가를 오래 지켜보며 특정한 상황에서의 그들의 선택과 미묘한 변화를 포착하는” 방식으로 인물을 입체적으로 담아온 그는 고인의 생전 삶을 ‘관찰’하기 위해 200시간 넘는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미담이나 영웅담을 좋아하지 않는 감독 덕분에 <노회찬 6411>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인간 노회찬’의 고단했던 생이 담겨 있다.

<노회찬 6411>의 감독 민환기 중앙대 교수. 그는 창업에 뛰어든 청년들의 도전과 불안을 그린 <미스터 컴퍼니>로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부문 대상(BIFF메세나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인디밴드 멤버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제주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30대 여성을 다룬 <청춘선거> 등의 다큐멘터리도 만들었다. / 명필름·시네마6411 제공

<노회찬 6411>의 감독 민환기 중앙대 교수. 그는 창업에 뛰어든 청년들의 도전과 불안을 그린 <미스터 컴퍼니>로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부문 대상(BIFF메세나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인디밴드 멤버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제주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30대 여성을 다룬 <청춘선거> 등의 다큐멘터리도 만들었다. / 명필름·시네마6411 제공

-노회찬 의원의 부인과 어린 시절 친구,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을 함께했던 동료들까지 모두 43명을 만나 200시간 넘게 인터뷰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사실 말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말씀들을 잘 하시는데도 호감이 가더라고요. 영웅담이나 미담을 모아서 보여주는 것은 제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노회찬 의원의 약점이 뭡니까’라는 질문을 많이 던졌는데 의외로 있는 그대로 얘기해 주려고 다들 노력하셨어요. 결정이 매우 느리고, 술을 많이 드셨다는 얘기들을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노회찬 의원이 ‘다큐 찍기 어려운 분이셨겠구나’라는 생각도 했어요. 가까웠던 이들에게도 속마음을 보여주지 않았고, 남 욕도 절대 안 하는 분이었다고 해요.”

-‘청년 노회찬’ 시절부터 약 36년간의 얘기가 진보정당의 역사와 함께 펼쳐지더라고요.

“노회찬 의원은 진보정당을 위해 인생을 바친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 있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진보정당의 흥망성쇠가 노회찬 의원의 삶과 같이 갔던 것 같아요. 진보정당의 성장, 정체, 위기에 대한 얘기 없이 이분의 삶을 얘기하는 게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누군가는 진보정당 운동의 역사를 많은 사람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작업을 시작하고) 꽤 빠른 시간 안에 그렇게 결정했어요.”

<노회찬 6411>은 도입부에서 맑은 날의 숲길을 보여준다. 5·18 민주화운동 이듬해 사회과학 서적만 잔뜩 담은 배낭을 메고, 숲속 암자로 향했던 ‘청년 노회찬’(당시 26세)이 보았을 그 숲길이다. 이어 노회찬 의원의 육성 회고가 낮게 깔린다. 노회찬 의원은 “어린 나이였지만, 남은 인생을 어디다 바칠 것인가, 대중과 함께해야겠다. 자기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소외된 노동자와 함께해야겠다고 거기서 결심을 완전히 굳혔습니다”라고 말한다.

노회찬은 정말 그 결심대로 살았다. 1987년 민주화, 1991년 소련 해체를 겪으며 ‘비합법의 길’ 대신 제도권 진보정당이라는 수단을 택했을 뿐, 노동자와 투명인간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원칙은 끝까지 고수했다.

환희의 순간은 노회찬의 생각보다는 빨리 찾아왔다. 그는 용접공으로 위장취업해 노동운동을 하다 2년여 복역 후 1992년부터 진보정당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에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깜짝 놀랄 만한 선전을 하게 된다. 여기엔 노회찬이 추진했던 1인 2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도입된 영향이 컸다. 이 시기 노회찬은 민주노동당의 ‘얼굴’로 방송토론에 나와 각종 어록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인생이 늘 그렇듯, <노회찬 6411>의 노회찬에게도 기쁨은 짧았다.

민주노동당은 창당 4년 만인 2004년 국회의원 10명을 배출했다. 당시 ‘기호 12번 민주노동당’ 띠를 두르고 유권자들을 만났던 노회찬 의원 / 명필름·시네마6411 제공

민주노동당은 창당 4년 만인 2004년 국회의원 10명을 배출했다. 당시 ‘기호 12번 민주노동당’ 띠를 두르고 유권자들을 만났던 노회찬 의원 / 명필름·시네마6411 제공

4년 후 민주노동당은 분당됐고 그는 진보신당 후보로 노원병에 출마하지만 패배한다. 2010년 서울시장선거를 완주한 후엔 ‘민주당 패배’를 초래했다는 비난도 한몸에 받았다. 2011년 통합진보당으로 진보세력의 힘을 합하는가 싶었는데 이듬해 또 분당사태가 터진다.

-대중이 ‘기대하는’ 노회찬 의원은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즐거운 사람이잖아요. 진보정당에 닥치는 위기를 몇 번이고 통과하는 ‘다큐 속 노회찬’을 보는 것이 조금 힘들기도 했습니다.

“고난의 상황에서도 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았던 것, 그게 그분의 진가라고 생각해요. 노회찬은 당내에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싸울 때도 인간의 보편적인 이야기, 휴머니즘에 호소했습니다. 이해관계를 위해 기술이나 기교를 부리지 않고 휴머니즘의 원칙을 계속 지켰던 거죠. 사실은 (분당사태 등의 갈등이) 재미없을 수도 있는 얘기예요. 사람들이 흥미로워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명필름에서 제게 감독을 맡긴 의도가 있었을 거라 생각했어요. 흥미 위주로 가자는 뜻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죠.”

-통합진보당 분당사태 때의 몸싸움 현장이 그대로 나와 놀랐습니다.

“노회찬 의원은 진보정당이 한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한 그림이 있었고 그것을 실현해 왔던 것 같아요. 2008년까지는요. 이후 민주노동당이 분당됐지만 그래도 ‘다 같은 생각을 하는 동지들’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양당체제를 흔들) 제3세력이 되기 위해 마지막 시도를 한 것이 2012년(통합진보당 출범)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분당사태가 또다시 터졌으니)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 충격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몸싸움 현장을) 그대로 담았죠.”

노회찬 의원은 평소 동료들에게 소외된 ‘투명인간’들과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에게 문제의 해결은 함께 비를 맞은 후의 ‘결과’여야 했다. 2009년 당시 진보신당 대표였던 노회찬 의원이 용산참사 유가족, 문정현 신부와 함께 용산참사에 대한 정부의 책임 있는 해결을 촉구하며 삼보일배를 하다가 경찰에 막혀 무산되자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 명필름·시네마6411 제공

노회찬 의원은 평소 동료들에게 소외된 ‘투명인간’들과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에게 문제의 해결은 함께 비를 맞은 후의 ‘결과’여야 했다. 2009년 당시 진보신당 대표였던 노회찬 의원이 용산참사 유가족, 문정현 신부와 함께 용산참사에 대한 정부의 책임 있는 해결을 촉구하며 삼보일배를 하다가 경찰에 막혀 무산되자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 명필름·시네마6411 제공

노회찬 의원은 “지금의 시대정신에 걸맞은 사회적 의제는 무엇인가를 고민하는”(이광호 전 진보정치 편집위원장) 정치인이었다. 특히 2005년 8월의 이른바 ‘떡값 검사’ 실명 폭로는 그의 정치적 결단이 빛났던 사건이다. 그는 국회에서 고위급 검사에게 “X파일에 돈 받은 걸로 나와 있다,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밝히라” 며 따져물었고, 검사들은 그의 추궁에 답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노회찬 의원이 있었기에 우리는 인사청문회에서 이런 질문에 답하는 대법원장 후보자도 볼 수 있었다. “후보자께서는 우리나라에서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답변: 법은 그렇게 돼 있죠) 판결문에 보면 이런 것들이 나옵니다. ‘전문경영인으로서 한 직장에서 수십년동안 성실히 재직해온 점을 감안한다’. 여쭙겠습니다. 대한민국 판결문 중에 ‘피고인은 수십년간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감수하면서, 산재 위험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노동해온 점을 감안하여’ 이런 구절 보신 적 있습니까. (답변: 못봤습니다)”(2005년 이용훈 대법원장 인사청문회)

노회찬은 한마디로 진심으로 ‘인간이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유머와 풍자는 이런 철학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노회찬 6411>에는 그가 소외된 노동자 등 투명인간들과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에게 문제의 해결은 함께 비를 맞은 후의 ‘결과’여야 했다. 그의 장례식 때 국회 청소노동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서럽게 울었던 것은 노회찬 의원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민 감독) 정치인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회찬의 위트와 유머, 풍자는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2004년 총선 이후부터 방송토론에 활발하게 나와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방송 토론장에서 포즈를 취한 노회찬 의원 / MBC 제공

노회찬의 위트와 유머, 풍자는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2004년 총선 이후부터 방송토론에 활발하게 나와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방송 토론장에서 포즈를 취한 노회찬 의원 / MBC 제공

-인터뷰 내용 중에 혹시 영화에 담지 못해서 아쉬웠던 대목이 있나요.

“많은 분이 우셨어요. 그냥 우는 게 아니었어요. 얼마나 슬퍼하는지 알 수 있는 눈물을 봤어요. 3년이 지났는데도 그랬어요. 그 눈물만 이어놔도 되겠다 싶을 만큼요. 노회찬 의원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겠더라고요. 하지만 너무 슬프게 끝나게 될까봐, 영화에는 한분만 넣었지요.”

<노회찬 6411>의 마지막 대목에선 노회찬 의원의 유서와 그의 마지막 선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2018년 노회찬 의원은 유서에서 ‘경제적공진화모임’으로부터 4000만원을 받았으나 정상적인 후원 절차를 밟지 않은 사실을 밝히고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과거 ‘청년 노회찬’과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옛 동료 최봉근씨는 그의 선택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아는 것과 하는 것, 겉과 속이 일치하는 드문 사람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불일치가 생긴 거예요.” 그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북받치는 울음을 삼키며 덧붙였다. “그 불일치를… 목숨으로 바꿨죠.”

-<노회찬 6411>을 만든 감독에게는 노회찬 의원이 어떻게 기억될까요.

“노회찬 의원은 사람들이 ‘먹는 걱정’ 많이 하지 않으면서 인생을 즐길 수 있길 원하셨던 것 같아요. ‘모든 시민이 악기 하나쯤 연주하는 세상’ 얘기도 그래서 하신 것 같고요. 경제 규모를 생각하면 그 목표가 아주 멀리 있지는 않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고, 진보정당이 좀더 노력하면 노회찬 의원 당대에는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노회찬 의원은 ‘사람을 사람으로’ 본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못배웠다고 해서 가르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들으셨다고 해요. 그리고 다들 노회찬 의원을 만나면 그렇게 즐거우셨대요. 저에게 노회찬 의원은 인간이라는 불안한 존재에 대해 지치지 않는 존중을 보냈던 사람, 인간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않았던 사람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송윤경 기자kyung@kyug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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