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몇명만 참아’ 한국에는 없는 어떤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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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낯선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기후변화는 그 원인이 인간사회 내부에 있더라도, 결과적으로 인간을 향한 자연의 위협으로 나타난다. 오로지 인류 전체의 노력으로만 그 위협에 대응할 수 있다. 지금의 위기는 오히려 새로운 시대를 위한 계기일지도 모른다. 이른바 ‘포스트코로나’에 관한 최근의 논의는 이런 위기의식과 기대감이 뒤섞인 결과물이다. 하지만 과연 한국은 변화를 위한 준비가 돼 있는가? 오히려 한국의 팬데믹 대응방식은 오래된 관성으로 새로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놀라운 증거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한국의 위기극복 방식

팬데믹의 위협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분명 그것은 ‘모두의 문제’이지만, 과연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할까? 불이 난 건물 안에 여러 사람이 갇힌 상황을 상상해보자. 모두가 안전한 탈출을 원하지만, 그것은 각자의 문제가 될 수도, 공동체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은 단지 상호 협력의 유무가 아니다. 각자 살길을 모색하면서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타인과 협력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안전을 위해 타인을 이용할 것이다. 모두의 안전을 공동체의 문제로 다룬다는 것은 전혀 다른 논리를 전제한다. 모두의 안전이 개인의 목표가 되고, 개인의 안전이 모두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개인보다 집단을 강조해온 한국사회는 이런 공동체의 논리를 따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은 획기적인 제3의 논리가 적용되는 곳이다. 즉 힘 있는 다수가 ‘우리만이 공동체다’라고 선언하며, 힘없는 소수를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불난 건물을 벗어날 수도 있다. 생존자들의 마지막 장면은 아마도 서로 돕고 협력하며 위기를 탈출한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으로 묘사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존 뒤에는 희생당한 소수가 있고, 이들은 공포심과 죄책감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한국의 성장과 성공 뒤에는 이런 공포영화의 한장면이 펼쳐져 있다. 이른바 ‘K방역’도 별로 다르지 않다.

팬데믹은 세계 모든 곳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악화시키지만, 지금 한국의 문제는 단지 ‘불평등’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국가가 방역정책에서 발생한 사회적 부담을 소수 집단에 떠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엄격한 거리 두기 조치는 자영업자의 경제활동을 대가로 삼는다. 학교와 공적 공간의 폐쇄는 돌봄노동을 가정, 특히 가정 내 여성에게 부과한다. 코로나19 의료체계는 의료진을 갈아넣으며 작동한다. 의료서비스가 코로나19에 집중될수록 질병과 장애를 가진 시민은 더 큰 위험에 노출된다. 시민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집회와 파업을 하는 것도 엄격히 제한된다. 국가는 공적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지보다 어떻게 아낄지에 집중하며, 위기극복을 위해 모두 참고 견디라고 요구한다. 감내해야 하는 고통의 정도는 평등하지 않지만, 그건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소수 집단에 집중되는 고통과 부담은 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 각자의 문제일 뿐이다.

시민의 공동체는 없다

소수를 희생시켜 위기를 극복하는 시스템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어렵다. 누구나 다음 희생자가 될 위험이 있으므로, 그런 시스템을 고집할 사람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특정 집단만을 희생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다. 계급사회로 회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독특한 시스템이 한국에 존속할 수 있는 첫째 이유는 군사 독재 시기에 형성된 국가체제와 제도에 있다. 독재국가가 반민주주의인 것은 단지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했기 때문은 아니다. 무엇보다 시민의 공동체 없는 국가였다. 박정희 국가는 시민의 공동체를 ‘국민’과 ‘민족’으로 대체하며, 시민 간 관계를 파괴했다. 개인은 국가의 동원 체제를 통해서만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국가는 ‘공익’을 명목으로 개인의 권리를 박탈했고, 약한 집단을 희생시켜 ‘국민의 경제적 번영’을 도모했다. 1987년 이후 형식적 민주주의는 꾸준히 발전해왔지만, 국가와 제도의 기본적인 작동 방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고, 시민의 공동체는 여전히 부재하다. 개인들은 공동체를 새로 만들기보다 열심히 ‘노력’해서 생존의 가능성을 높이는 데 열중한다.

민주주의의 기본단위는 정치 공동체이고, 그 구성원을 시민이라 부른다. 모든 시민은 자유로운 개인이고, 모두 자유롭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공동체의 시민은 서로 ‘연대’한다. 이 말의 의미는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단 한명의 시민이라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모두 자유롭지 않고, 단 한명의 시민이라도 차별받는다면 모두가 평등하지 않다. 다른 시민의 사회적 문제는 나 자신의 문제이고, 나의 사회적 문제는 그의 문제이다. 나와 그의 문제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것, 즉 공동체의 문제다. 시민의 공동체는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 중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시작이자 끝이다. 하지만 이런 의미의 시민은 대한민국 헌법에도 없고 현실에도 없다.

한국사회에서 ‘당신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이고 공동체의 문제다’라는 의식을 찾기는 어렵다. 시민들의 연대는, 예컨대 여성들의 연대, 노동자들의 연대와 다른 차원에 속한다. 나와 타인의 사회적 조건이 무엇이든 오로지 한 공동체의 시민이라는 사실에 의해 상호 책임이 성립한다. 그래서 남성은 차별받는 여성과 연대해야 하고, 기업주는 불안정한 노동자와 연대해야 하며, 평생 만날 일 없는 타지역 이주민의 고통을 모두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이는 “개인의 문제를 국가가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과도 다르다. 국가 정책은 공동체가 시민의 문제에 개입하기 위한 한가지 수단일 뿐이다. 요컨대 국가가 자영업자를 지원해야 한다, 혹은 돌봄노동 지원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전에 자영업자와 돌봄노동의 문제가 시민 모두의 문제라는 것이 합의돼야 한다.

물론 시민의 공동체는 ‘이제부터 만들어보자’고 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상상하고 이해하려는 작업이 없다면, 한국사회는 앞으로도 과거의 방식으로 새로운 위기에 대응하게 될 것이다. 때로는 그것이 민주주의보다 더 효율적이겠지만, 누군가는 희생자가 될 것이고, 남은 이들은 불안과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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