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미련한 녀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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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에서]“이런 미련한 녀석아”

초등학교 6학년 때 일로 기억합니다. 버스로 예닐곱 정거장쯤 되는 거리를 가야 했는데요, 버스요금이 아까운 겁니다. 용돈이 궁하던 시절, 버스요금이라도 아껴보자는 생각에 걷기로 했습니다. 여름 한낮이었습니다. 세 정거장쯤 가다가 안 되겠다 싶어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먹었습니다. 그랬더니 고작 몇백원 남더군요. 버스 타면 15분 거리를 뙤약볕 아래 1시간을 족히 걸었습니다. 몸은 몸대로 파김치가 됐고, 시간은 시간대로 낭비했습니다. “아이고 이런 미련한 녀석아”라며 혀를 끌끌 차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선합니다.

전 국민 88%에게 주겠다는 5차 국민지원금이 딱 이런 꼴이 아닌가 싶습니다. 12%의 국민을 골라내 예산을 한푼이라도 아껴보자는 심산이었겠지요. 하지만 내가 왜 12%에 드느냐며 항의한 이의신청만 벌써 30만건이 넘었다고 합니다. 폭주하는 이의신청에 읍면동 행정복지센터는 난리가 났습니다. 깜짝 놀란 정부는 가급적 이의신청을 받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럴 거면 애초에 88%라는 기준은 왜 설정한 것일까요. 사실 이의신청도 말처럼 쉽지는 않다고 합니다. 챙겨야 할 서류가 너무 많습니다. 부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에 굴욕감도 느낀다고 합니다.

예상된 혼란이었습니다. 6월 건강보험료는 부자국민 12%를 골라내기에는 부적절한 자료였습니다. 직장인과 자영업자의 소득파악률이 다르고, 이들이 보유한 자산가치도 각기 다르게 반영됩니다. 이를 부의 기준이랍시고 들이대니 “내가 무슨 부자냐”는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정부가 잃은 것은 또 있습니다. 세정개혁이라는 기회비용 말입니다. 아직도 세금은 ‘뜯어가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세금을 낸 만큼 우대나 혜택을 받아본 기억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금을 받는 사람과 지원을 받는 사람을 나눠버린 선별복지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5차 국민지원금은 탈루한 사람들은 받고, 원칙대로 ‘따박따박’ 소득신고를 한 사람들은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 국민지원금을 받지 못한 한 프리랜서는 “그동안 세금과 각종 사회보장료는 나라에서 내라는 대로 다 냈다”며 “앞으로는 영수증 한장 악착같이 챙겨 신고하고 의료보험료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줄이겠다”며 속상한 심정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성실납세자는 위기 때 반드시 챙겨준다는 것을 이번에 보여줬더라면 어땠을까요? 납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쓰지도 못할 세금포인트나 상장쪼가리보다 훨씬 효과적이었겠죠. 행정비용에 사회갈등비용 그리고 기회비용까지 감안하면 정부는 도대체 몇푼이나 아꼈을까요? 참 미련했던 정책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박병률 편집장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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