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뿌리 내리기’! 아프간 피란민 구호 제2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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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 확실한 주택 확보 방안 아직… 수용국 정치적 성향도 난민 정착 변수

지난 8월 30일 밤 11시 59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공항에서 미군의 마지막 C-17 수송기가 이륙했다. 20년을 끌어온 아프간전쟁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들의 긴박한 대피작전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17일간의 대피로 아프간을 빠져나간 피란민은 12만3000여명. 탈레반으로부터 위협받는 이들 다수가 여전히 아프간에 남겨졌지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대단한 성공”이라 자평했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지난 8월 21일(현지시간) 밤 아프간 피란민들이 미 공군 C-17 수송기에 빼곡히 탑승해 있다. / 카불 | AP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지난 8월 21일(현지시간) 밤 아프간 피란민들이 미 공군 C-17 수송기에 빼곡히 탑승해 있다. / 카불 | AP연합뉴스

미국과 유럽은 아프간 피란민의 구호에 여전히 많은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향후 아프간을 탈출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들이 여전히 많기도 하지만, 이들을 데려오는 것만으로 구호를 마쳤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정착하기까지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줘야 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교육과 의료지원도 해야 한다. 현실적인 문제들과 씨름해야 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당면과제는 재정과 주택

난민지원을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돈이다. 이번 사태에선 특히 짧은 시간에 대규모 난민이 이동한 만큼 수용국들의 상당한 재정 부담을 촉발할 전망이다. BBC가 입수한 영국 정부 문서에 따르면, 영국은 아프간인들의 재정착을 위해 최근까지 4억파운드(약 6404억원) 미만의 금액을 배정했는데, 향후 3년 동안 추가로 5억5700만파운드(약 8918억원)가 필요할 것으로 예측됐다. 영국은 앞서 영국군과 함께 일한 약 8000여명의 아프간인을 수용한 바 있다.

영국 정부는 지방 정부에 자금을 지원해 아프간 주민들의 재정착을 도울 예정이다. 하지만 향후 소요될 자금이 많다 보니 재정문제를 확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노동당의 닉 토마스 시몬스(그림자 내각 내무장관)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국가적 지원을 제공하는 데 있어 역할을 다하지 못한 채 나서는 것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단기간에 주택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영국 정부는 지방 의회가 확실한 지원을 해줄 것을 기대했으나, 주택 확보가 어려운 지역에선 주택을 다수 보유한 개인이 나서줄 것을 독려하고 있다. 기존에 주택 대기자 명단에 있던 영국인들보다 아프간인들에게 먼저 주택을 제공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미국도 주택문제를 두고 고심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아프간 피란민의 급격한 입국으로 재정착을 돕는 기관들의 부담이 늘어났으며, 이들이 저렴한 주택을 찾는 동안 피란민들은 호텔과 숙박공유 업체가 임대하는 주택을 이용하고 있다. 앞서 알레한드로 마요르카스 미 국토안보부 장관은 특별이민비자(SIV) 신청자 등 5만명 이상의 아프간 피란민들이 재정착 절차를 밟게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미 국방부는 난민들의 잠재적 거주지로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몇개 지역을 거론한 바 있으나, 현실은 간단치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기독교 초교파 구호단체 ‘처치월드서비스’ 관계자는 비즈니스인사이더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캘리포니아에 발생한 화재 진압을 돕기 위해 오고 있고, 다수 호텔의 예약이 차 있어 임시숙소조차 찾기 힘든 상태”라 말했다.

난민지원기구들의 여력이 크게 위축된 것도 재정착을 돕는 데 난관이 되고 있다. 이들 기구는 매년 정착을 지원한 난민수에 비례해 정부지원금을 받는데,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난민수가 사상 최저를 기록하며 3분의 1가량이 문을 닫은 것이다. 남아 있는 한 지원단체 관계자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단체의 지역 사무소는 비용을 즉시 충당할 수 있다는 보장 없이는 보호 요청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라며 “지금 기금을 모금하고 있지만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워싱턴 외곽 덜레스 국제공항을 통해 미국에 입국한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지난 8월 22일(현지시간) 버지니아주 챈틸리에 마련된 임시 숙소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고 있다. / 챈틸리 | AP연합뉴스

워싱턴 외곽 덜레스 국제공항을 통해 미국에 입국한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지난 8월 22일(현지시간) 버지니아주 챈틸리에 마련된 임시 숙소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고 있다. / 챈틸리 | AP연합뉴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한 단체들은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들을 위해 ‘재건’을 서두르고 있다. 국제구조위원회(IRC) 측은 재정착 지원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우선 직원수를 다수 늘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히브리이민자지원협회(HIAS)도 트럼프 행정부 시절 해고한 직원들을 다시 배치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독일 총선 핵심 이슈로 부상

수용국들의 정치적 성향도 난민 재정착의 주요 변수다. 특히 유럽연합(EU)의 맹주인 독일은 9월 26일 총선이 예정돼 있어 난민정책의 향배가 주목된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2015년 시리아 사태 당시 100만여명의 망명 신청자들을 수용했고, 이번 아프간 사태에서도 최대 4만명에 대한 재정착을 돕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이달 26일 정계를 은퇴할 예정이다.

난민문제는 이미 총선의 핵심 이슈로 부상했다. 아프간 난민들의 유입이 늘어나자, 이를 불안해하는 여론이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3분의 2가 시리아 난민 사태의 반복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여론이 확산하면 선거 이후 보다 폐쇄적인 난민정책에 힘이 실릴 수 있다. 독일 최대의 난민구호단체 ‘프로아질(Pro Asyl)’의 칼 코프 이사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아프간의 비극적인 사건이 독일에서 이주 문제에 대한 유독한 논의를 낳았다”고 말했다.

난민 유입에 대한 대중의 우려는 극우정당의 선전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난민 반대를 강조한 독일대안당(AfD)은 시리아 사태 당시 대중의 위기감을 자극해 성공 가도를 달렸고, 의회까지 입성했다. 그 뒤 난민 숫자가 줄어들며 지지율이 하락했으나 이번 아프간 사태가 발생하자 다시 반등을 노리고 있다. AfD는 독일 내에서의 유엔 난민협정 적용을 중단하고 난민이 가족을 데려오는 것을 금지하며, 영주권을 얻기까지 10년의 대기시간을 요구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있다.

총선을 기다리는 독일 내 난민들의 심정은 착잡하다. 독일에 정착한 시리아인으로 2015년 메르켈 총리와 셀카를 찍기도 했던 아나스 모다마니는 현지 매체들과의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독일인은 AfD에 투표하지 않을 것”이라며 “다만 ‘만약 AfD가 강해지고 차기 정부가 시민권 신청을 더욱 어렵게 만들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

<박용하 국제부 기자 yong14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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