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만 대접받는 ‘그들만의 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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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에 180만원. 연극배우 김상원씨(가명·36)는 소속 극단 단원들과 함께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진행하는 ‘공연예술분야 인력지원 사업’에 신청서를 냈다. 김씨의 극단이 지원대상으로 선정되면 김씨와 단원들은 3개월 동안 월 180만원씩 인건비를 받을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긴 암흑기를 보내는 공연예술분야 예술인들에게 이 돈은 가뭄 속 단비 같은 도움이긴 하지만 뒷맛이 개운한 건 아니다. 앞서 올해 ‘대한민국공연예술제 지원사업’의 예산 삭감 방침이 밝혀지면서 각각의 특색을 지닌 유서 깊은 예술축제 6개가 지원금을 한푼도 받지 못해 아예 열리지도 못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인건비 지원사업에 신청은 넣었지만, 정부가 예술제 지원 예산이 줄었다고 반발하는 공연계에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며 무마하는 느낌이라 불편하다”고 말했다.

2014년 9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대한민국예술원 개원 60주년 기념 국제포럼이 진행되고 있다. / 문화체육관광부 제공

2014년 9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대한민국예술원 개원 60주년 기념 국제포럼이 진행되고 있다. / 문화체육관광부 제공

정부로부터 한달에 180만원을 받는 예술인들은 더 있다. 그런데 이들은 3개월만 받고 마는 한시적 지원대상이 아니라 사실상 평생 다달이 이 돈을 받을 수 있다. 바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들이다. 예술원은 원로 예술인에 대한 예우와 창작지원을 위해 운영 중인 기관이다. 총원 100명으로 정원을 둔 이 예술원의 회원으로 선정되면 4년의 임기 동안 자격이 부여된다. 하지만 연임이 가능해 사실상 종신 지위에 가깝다. 현재는 별세해 공석이 되는 등의 이유가 발생했지만 회원을 전원 충원하지는 않아 90명의 회원이 소속돼 있다.

대한민국예술원의 올 한해 예산은 32억6500만원이다. 예술원 실무를 담당하는 사무국 운영에 필요한 예산도 포함돼 있지만, 회원들에게 월 180만원씩 지급하는 수당이 예산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여기에 4개 분과에서 1인당 1억원씩 지급하는 대한민국예술원상 상금 규모도 만만찮다. 예술원 회원은 수상할 수 없지만 수상 대상자 추천부터 심사위원까지 회원들이 직접 맡는다. 그래서 예술원 회원과의 관계가 없으면 애초에 수상 공모에 나설 엄두조차 못 낸다는 예술계 내부의 불만도 크다. 올해 예술원상 수상자 중에서도 기존 회원의 가족과 대기업 제약사 대표의 부인이 포함됐다는 점이 알려져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청년 예술인과 극명하게 대비

그간 예술원 회원들이 사실상 종신회원에 가까운 특혜를 누리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드물었다. 문화예술계 안에서는 소수의 원로 회원들이 독점적 지위를 견고하게 지키고 있다며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공론화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난 7월 소설가 이기호씨(49)가 주도해 문학계 내에서 예술원 관련 법령을 개정하자는 주장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문학계를 넘어 문화예술계 전체와 일반 시민사회에서도 반향이 일었고,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대한민국예술원법 개정을 요구하는 청원이 올라온 상태다.

이기호 작가가 의문을 제기한 예술원 회원의 종신 자격 문제와 회원 선정 및 예술원상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 투명성을 확보해 달라는 요구는 문학지 ‘악스트’ 7·8월호에 발표한 단편소설로 더욱 주목받았다. 보고서 형식을 일부 빌려온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도래할 위협에 대한 선제적 대응 방안(문학분과를 중심으로)’이란 제목의 독특한 이 단편에서 그는 일부 특권계층의 ‘철밥통’처럼 돼버린 회원 자격을 문제삼았다. 그는 “예술원 문제의 본질에는 나처럼 혜택받은 문인들이 유지한 ‘침묵의 카르텔’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 문제를 소설로 쓰게 됐다”고 밝혔다.

이 작가의 주장에 국내 문단 내부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한국작가회의가 호응하며 관련된 논의는 점점 확대되고 있다. 작가회의는 지난 8월 19일 성명을 통해 “국가가 예술원을 운영하는 데 있어 국민의 세금을 무분별하게 사용하거나 일부 예술가들의 특권적 지위를 보장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현재의 법령이나 운영 방법은 예술계의 보편적 정서와 시대정신에 따라 개정하고 혁신돼야 마땅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작가와 작가회의가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문제는 문학계 안에서 청년 예술인과 원로 예술인 간의 대우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 청년예술가 지원 사업비 가운데 문학 부문 예산은 고작 4000만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비슷한 규모의 예산으로 예술원은 지난해 회원 쉼터를 꾸미고 작품집을 발간하는 데 썼다. 예술원의 ‘2020년 하반기 계약현황’ 문서를 보면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쉼터 조성’과 ‘예술원 회원 쉼터 조성 비품 구입’에 2034만원이 들어갔다. 예술원 사무국 관계자는 “예술원 부회장실이 따로 있었는데 사용하는 빈도가 낮아 예술원을 방문한 회원들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코로나19 확산으로 문학분과에서 시·소설 낭송회를 열 수 없게 되면서 대신 회원 작품집 <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를 발간하는 데에 951만원이 들었다. 그런데 예산을 들여 국민의 문학적 소양을 증진하기 위해 이 사업을 시행했지만 정작 국민은 이 작품집을 감상할 수조차 없다. 시중 서점에서 판매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각 지자체나 지역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공립도서관에서도 찾을 수 없다. 책을 대출해갈 수 없는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 방문해야만 이 책을 열람할 수 있다.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한푼의 지원금조차 아쉬운 청년 예술인의 현실과는 무관하게 예산이 방만하게 지출된 것이다.

“공적 남긴 원로 대우는 필요하다”

예술원 회원들은 이와 같은 비판에 대해 ‘악의적인 문제 제기’라며 항변했다. 이근배 예술원 회장(시인)은 “문학분과 소속 소설가 9명 가운데 과거 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연금을 지급받는 회원은 2명뿐이고 나머지는 연로해 예술원 수당 180만원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데 이런 예우조차 박탈해야 하느냐”고 말했다. 이어 이 회장은 “이기호 작가와 작가회의는 예술원 회원들이 신규 회원과 예술원상 수상자를 선정할 때 짬짜미라도 하는 것처럼 비난하지만 회원 간 의견이 서로 달라 매번 진통을 겪는 고충은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예술원상 문학분과 수상자를 뽑는 과정에서도 회원들 간의 의견이 맞서서 결국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며 오히려 외부 위원들이 참여하면 현재만큼의 투명성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예술원 회원 역시 “과거 예술인들이 그리 높은 대우와 보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켜 공적을 남긴 원로들에게 어느 정도 대우는 해줄 수 있는 것”이며 “오히려 젊은 세대와 원로 세대를 가르지 말고 예술인 모두에게 지원이 돌아가는 긍정적 방안을 찾는 데 나섰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의견에 대해 문화예술계에서도 예술원 개혁이 원로들에 대한 지원을 전적으로 중단하라는 뜻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문화연대는 지난 8월 25일 논평을 내고 “오랫동안 예술계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많은 분으로부터 존경받아온 예술가들을 국가가 예우를 해주는 제도가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문화연대는 예술원의 혁신을 위한 방안으로 신규 회원 선정 과정에 기존 회원 관여 방지 대책을 마련하고, 회원 임기를 한정하며, 월 180만원의 정액 수당 대신 다른 방식의 지원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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