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비정규직 철폐 외친 기륭전자 노동자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10년 전투가 남긴 건 ‘승리’ 아닌 ‘연대’

1966년 외국인투자기업으로 설립된 ‘기륭전자’는 디지털 셋톱박스와 디지털 라디오 등을 만드는 회사다. 2005년까지는 연매출 1600억원, 당기순이익 60억원에 달했던 중견제조업체였지만, 2010년 최동열 대표이사 취임을 전후해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대표이사의 업무상 배임과 비위행위로 점차 기울다가 2014년 상장 폐지된 뒤 사실상 폐업에 이르렀다.

2008년 기륭전자 앞 천막에서 단식농성 중인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모습. / 김창길 기자

2008년 기륭전자 앞 천막에서 단식농성 중인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모습. / 김창길 기자

위성수신 라디오 개발에 돌입한 2002년 초, 기륭전자는 구로공단에서 가장 먼저 생산공정에 파견직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이후 구로공단 내 대부분 사업장이 파견업체를 통해 충원했다. 제조업체 상당수가 지방으로 공장을 이전하는 추세였던 시기라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불안정한 파견직 일자리를 찾았다.

2002년 여름 50~60명 정도였던 생산직 규모는 가을에 접어들면서 100여명으로 늘었다. 일감이 늘면 파견직을 더 뽑고, 일감이 줄면 파견직으로 내보내는 방식으로 정규직은 줄이고 비정규직은 늘렸다.

‘문자 받지 말고 내일 보자’ 기륭전자의 노무관리 방식은 유독 야비한 측면이 있었다. 노동자들의 기본급이 크게 차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1등급 정규직, 2등급 계약직, 3등급 파견직으로 나누고 상여금을 차등 지급했다. 정규직 중 업무가 느리거나 서툰 해고 대상자에게 관리직을 맡겨 업무 압박을 주고 내몰았다. 노동자를 기계부품 취급을 하고 모욕적인 대우를 서슴지 않았다. 잡담을 했다고 해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고했다. 오죽하면 일과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문자 받지 말고 내일 보자는 게 인사였을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장 분위기는 각박했고, 노동자들은 동료를 경쟁상대로만 보았다. 3일을 버티는 신규 파견직원은 거의 없었고, 3일 출근을 하고 나서야 동료들이 말을 걸어올 지경이었다고 한다.

드물게 정규직과 계약직, 파견직 노동자가 모두 함께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비정규직 차별 철폐’가 아닌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며 싸웠던 기륭전자분회가 결성된 날은 2005년 7월 5일이다. 오전 10시 쉬는 시간 10분 동안, 200여명의 노동자가 조합가입서를 썼다. 인간답게 일하겠다는 열망이 보여준 쾌거다.

노조를 만들고 한달도 지나지 않아 회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2010년 11월 정규직 복직 합의까지 1895일을 싸우고, 2년 6개월의 복직 대기기간을 보낸 후 2013년 5월 2일 정규직으로 첫 출근을 했지만 회사는 일을 시키지 않았다. 2013년 12월 30일 도망치듯 이사를 가버린 회사에서 조합원들은 다시 358일의 철야농성을 또 해야 했다.

안 해본 싸움이 없다 기륭전자의 싸움은 크게 두가지 노동문제를 드러냈다고 평가받고 있다. 하나는 노동조합 결성 후부터 노사합의를 이룬 1895일의 싸움인데, 이때는 비정규직과 간접고용의 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고 싸웠다. 다른 하나는 2010년 11월 1일 합의 이후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난 먹튀 자본과의 싸움이다. 물론 투기자본이 이득을 취하고 철수하려면 정리해고, 도급화(비정규직화)가 주로 사용되므로 완벽하게 다른 문제로 보기도 어렵다.

2013년 야밤에 기습 폐업해 버린 구로공단 기륭전자의 사무실을 해고노동자들이 지키고 있다. 2014년 10월 촬영된 사진이다. 농성 281일째라는 숫자가 보인다. / 권호욱 기자

2013년 야밤에 기습 폐업해 버린 구로공단 기륭전자의 사무실을 해고노동자들이 지키고 있다. 2014년 10월 촬영된 사진이다. 농성 281일째라는 숫자가 보인다. / 권호욱 기자

기륭분회는 안 해본 싸움이 없다. 단식, 공장 점거 파업, 회사 옥상 점거, 고공농성, 오체투지, 미국원정투쟁까지…. 지리멸렬한 교섭과 회사 측의 판 뒤집기에 대응하기 위한 생존방식은 투쟁밖에 없다는 듯이, 열심히 싸웠다.

2008년 3월, ‘기륭여성비정규직 승리를 위한 공대위’가 꾸려졌다. 그해 5월 1일 노동조합 조합원 4명이 서울광장 조명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서울 남부지역 시민사회단체, 유가협과 민족민주열사 추모사업연대회, 인권단체연석회의와 민교협·민변과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싸웠다.

같은해 5월 26일 구로역 앞에서 고공농성이 또 시작됐다. 연일 촛불집회가 열렸고 투쟁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스크린쿼터문화연대, 민변, 민교협, 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관계자들이 촛불집회에 함께했다. 하지만 회사 측은 묵묵부답이었다.

2013년 11월 20일 기륭전자 복직 노조원들이 사회적 합의 실행을 요구하며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 김기남 기자

2013년 11월 20일 기륭전자 복직 노조원들이 사회적 합의 실행을 요구하며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 김기남 기자

6월 11일, 10명의 조합원이 집단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그중 3명의 노동자는 철조망을 걷고 공장 1층 옥상으로 올라갔다. 문제 해결이 되지 않으면 살아 내려오지 않겠다고 했다. 정치권을 압박하자는 공대위의 움직임도 효과가 없었다.

7월 22일에는 13명의 여성 국회의원이 기륭전자 여성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공동행동에 나섰지만 역시 회사는 무시로 일관했다. 그러는 와중에 암투병 중이던 권명희 조합원이 사망했다. 1000일 투쟁이 끝나고 기륭분회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에 결합한다. 이후 모든 비정규직을 위한 발걸음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기륭분회 조합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 꿀잠 건립과 운영에 참여하면서 여전히 비정규직 철폐투쟁에서 활약 중이다.

연대라는 희망 인간은 타인과 연결되고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 성장했고 어쩌면 다른 관점과 태도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타인을 만나 배우고 의존하면서 연결되기를 희망한다.

“노동자 투쟁은 많이 지고 가끔 이긴다. 그러므로 한 전투의 승패가 아니라 그 전투가 사람을 남기고 단결을 남기고 연대를 남겼는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투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기륭전자 노동조합의 여정을 담은, 기륭전자분회 투쟁 10주년 평가 자료집 표지에 적힌 문구다. 전투라는 말이 주는 긴장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실 그들의 10년은 전쟁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서로를 돌아봐 주지 못했던 동료들은 노조를 만들면서 10년 투쟁을 함께 겪은 동지가 됐고, 촛불시민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거칠게 쉰 목소리를 들었으며, 예술가들은 노동자들의 움직임과 마음의 소리를 다양한 작업으로 재현해냈다. 상급 조직에 아쉽기도 했을 테고, 이탈한 조합원의 빈자리는 헛헛했을 것이다. 아쉬움과 부족함을 감당하며 이들은 다른 비정규직과 여전히 함께 싸우고 있다.

우리가 미처 몰랐거나 알고 싶지 않았을 장면들이 그냥 흘러가게 두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덥석 참여한 기획이 오늘로 끝난다. 여전히 자기 앞의 싸움을 돌파하며 희망과 좌절 사이를 뒤척일 많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연대의 마음을 보내며.

※여성 노동운동 ‘이 장면’ 이번 호로 마칩니다.

<림보 ‘회사가 사라졌다’ 공저자>

여성 노동운동 ‘이 장면’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