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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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남 부장판사가 들려준 칼럼에 미처 담지 못했던 이야기

박형남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62)는 작가다. 2018년 책 <재판으로 본 세계사>를 냈고, 종종 대중강연도 나선다. “판사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춰야 한다”는 이야기도 자주 한다. 박형남 부장판사는 주간경향에 ‘법정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23회 연재했다. 시민과 판사의 간극을 좁혀보겠다는 의도에서 시작했다. 연재물은 책으로 나온다. 박 부장판사를 지난 8월 2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사무실에서 만났다. 칼럼에 미처 담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어봤다.

박형남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법원 제공

박형남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법원 제공

-최근 새 대법관 인선이 이뤄지고 있는데, 대다수 판사가 대법관을 꿈꾸는지 적지 않은 분들이 궁금해할 것 같다.

“마음속으로 대법관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거다. 판사도 공무원이어서 승진을 원한다. 경제적인 측면은 어느 정도 유명 변호사에 비해 희생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일을 잘해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판사도 예외는 아니다. 승진은 동기부여도 된다. 시민이 대법관이 되고 싶어하는 판사를 권력욕이 있다고 타박하는 것은 좀 과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좋은 재판으로 실력과 자질을 인정받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퇴임 이후에 변호사 개업을 할 의향도 있나.

“그건 당연하다. 우리나라는 퇴직한 판사가 일할 영역이 넓지 않다. 로스쿨은 수많은 판례를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알려줘야 하는데 정년 퇴임한 판사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일이다. 미국은 공익법인이 많아 활동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거의 없다. 사실 판사가 사회봉사 차원에서라도 퇴임 후 변호사 활동이 필요할 것 같다. 전관임을 내세워 돈을 많이 버는 게 문제다. 전직 판사들이 공익법인이나 석좌교수로 나가는 길이 좁은 상황에서 결국 변호사 개업을 택할 수밖에 없다. 나도 현재, 나름대로 투잡을 하려고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있지만(웃음).”

-2013년 국가정보원 선거개입사건에서 국정원 간부 2명을 기소하라는 결정을 내린 재판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검찰이 국정원 선거개입사건에서 국정원장만 기소했다. 나머지는 기소유예했다. 예전에 안기부 시절 총풍·세풍처럼 선거개입 때 어떻게 기소가 됐는지를 먼저 분석했다. 넘버원만 기소한 사례는 없었다. 선거개입 책임자 3~4명을 기소해왔는데, 말단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사건도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특정 정당에 불리한 결론이 나왔지만, 당파성 없이 올바르게 처리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서울고등법원에 온 뒤로 노동사건과 공정거래사건을 많이 맡았다.

“공정거래위원회와 기업이 규제의 정당성을 두고 다투는 사건을 주로 맡았는데, 우리나라 공정위만 다루는 사건들이 있다. 공정위는 전통적으로 담합방지를 주로 하는데, 우리는 총수일가의 일감 몰아주기나 가맹사업자 보호도 한다. 이 사건들은 해외에서도 판례가 거의 없다. 판사 입장에서 공정위에 학술적으로 백업할 수 있는 연구나 논문을 요구하는데, 공정위는 내부적으로 사무관이 만든 10여쪽짜리 페이퍼를 내더라. 예산 부족 등의 사정이 있겠지만, 총수 일가 견제와 같은 업무를 공정위가 하려면 탄탄하게 전문가 풀과 이론을 다져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산업재해사건에서 최초로 심리적 부검을 해 화제가 됐다. 최근에는 노동사건을 많이 다뤘는데,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우리 사회는 과로가 많지 않나. 노동자가 병을 얻거나 산재로 죽는 것은 숫자나 산술적 통계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마다 다른 육체적 건강과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능력의 차이인데. 노동사건 재판의 하급심 격인 노동위원회에서는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법적 안정성을 고려하는 것이기 때문일 텐데,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은 너무 기준이 형식적이고 좁다. 또 하나 유의할 점은 평균 노동자가 아니라 특정 개인의 주변환경과 건강상태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사람은 버티고 어떤 사람은 쓰러지는데, 쓰러진 사람에게 너는 왜 다른 사람처럼 이겨내지 못했냐고 탓할 수는 없다.”

박형남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방송 출연 직후 출연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박형남 제공

박형남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방송 출연 직후 출연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박형남 제공

-판사들의 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많다.

“판사수가 사건수에 비해 현저히 적은 게 문제다. 프랑스, 독일이나 일본보다 판사 1명이 맡은 사건수가 3~4배 많다고 한다. 지금까지 어느 정도 판사들이 희생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시민이 제일 불만인 게 5분, 10분 재판한다는 것 아닌가. 결국 판사수를 늘려야 한다. 현실적으로 사건을 줄이라고 할 순 없지 않나. 판사가 번아웃된 상태에서 법정에 들어서면 시민에게도 좋지 않다.”

-연재한 글에서는 검사와 판사의 관계나 검찰을 향한 비판적 시각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검찰개혁이 이뤄진 뒤 ‘형사가 민사재판에 가서 증거를 수집해오라고 한다’는 시민의 불만이 적지 않다. 경찰이 수사를 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비판인데.

“역량 문제라고 본다. 사실 경찰은 지금까지 수사 분야를 키우는 데 소홀했다. 어차피 검찰에서 다시 조사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경비나 정보 분야에서 주로 승진했다. 검찰개혁의 일환으로 여러 법률이 개정되기 전에 경찰의 수사 역량을 강화하고 확대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 같다. 사실 ‘형사사건의 민사화’는 부작용의 한 모습이고, 경찰이 수사 역량을 키우지 못했던 부분이 원인이라고 본다.”

-검찰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대로인지도 궁금하다.

“우리나라 형사사법에서 검사가 입법, 행정, 사법 권한을 사실상 다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의원은 검사 출신이 많다. 행정은 여기서 말하는 수사도 포함한다. 법무부는 수많은 행정부 내부, 유관기관과 관계를 맺고 있다. 형사재판의 집행권한이나 교도소와 구치소 운영도 관여한다. 우리 형사사법은 사실상 검사가 의원이 돼서 법도 만들고, 수사도 하고, 행정적으로 지원하고 집행해 제대로 견제받지 않았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라고 본다. 민주화 이후 검찰을 견제할 수 있는 기관은 사실상 법원밖에 없다.”

-그렇다면 법원은 누가 견제할 수 있을까. 이른바 ‘사법농단’ 사태 이후 ‘윗선’의 재판 개입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대법원은 대법관 인사권이나 예산권이 없다. 판사들 봉급 올려달라고 하더라도 기획재정부가 ‘노’ 하면 안 되잖은가. 그래서 항상 대법원과 법원행정처는 인사·예산권에 대해선 국회와 정부의 눈치를 봐야 하고 영향을 받는다.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게 곧 견제를 받는 시스템일 것이다. 문제는 적절하게 견제받아야 하는데, 최근 사법농단 사례는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이 법원행정처나 대법원에 특정 목적을 갖고 특정 사건에 부당하게 개입한 데서 비롯된 것 아닌가. 대법원이나 법원행정처가 자제해야 했는데, 일선 판사나 심의관에게 얘기해 적극적으로 대처한 게 문제였다.”

-직접 압력을 받은 적은 없었나.

“내 경험만 보면, 34년 동안 법원장이나 대법원에서 재판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국정원 대선개입 재판하면서도 대법원이나 정치권에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사법농단 재판에서는 여러 법기술적인 부분이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라는 이름으로 여럿 등장하기도 했다. 검찰수사를 받았던 판사들이 영장 발부 등에 더 엄격해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판사들이 피고인이 되면서 법정에서 지켜지는 절차가 더 꼼꼼해졌다는 지적은 아프다. 우리가 아는 ‘미란다 원칙’의 미란다는 사회 엘리트나 권력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미연방대법원은 체포 시 변호사 선임권 등을 경찰이 통보해야 한다며 피의자 권리를 보장해줬다. 사법농단 재판에서 절차를 하나하나 따지는 부분은 사실 일반 재판에서도 적절히 따졌어야 할 문제다. 지금까지 사법 편의주의로 결론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해서 절차를 무시하거나 넘어간 게 많았다. 절차가 하나하나 지켜진다는 점에선 좋지만, 그게 판사인 피고인에게만 엄격하게 적용되는 건 문제라는 비판은 수긍이 간다.”

-사법농단 재판이 길어지면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판사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절차적 사정이 있겠지만 2년 이상 재판이 지연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우리가 흔히 수사를 질질 끈다고 하면서 이를 ‘봐주기 수사’라고 비판하는데, 수사만이 아니라 재판도 늘어지면 안 된다. 다시 미란다 재판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가장 억울한 사람, 힘없는 사람에게 재판에서 여러 권리가 보장돼 재판이 길어졌다면 시민이 뭐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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