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페미니즘 사냥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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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래시가 몇개월째 난동을 부리고 있다. 페미니즘을 증오하는 남성들이 손가락 고리 모양을 찾아 헤매고, 이른바 ‘페미’를 색출한답시고 여성에 대한 낙인찍기를 시도한다. 이제는 도쿄올림픽 양궁 국가대표 안산 선수를 겨냥하고 있다. 이번에는 양상이 다르다. 그들의 주장과 행동이 워낙 황당한 수준이다 보니 대중의 피로가 상당히 누적됐다. 공격 대상이 ‘태극전사’라는 사실은 페미니즘에 대한 증오를 압도한다. 그럼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반페미니즘 난동이 소멸하게 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이번 사건의 의미는 역설적이다. 올림픽 3관왕 정도의 ‘역사적 인물’이 피해자가 될 경우에만 백래시를 반격할 여론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주류 여론을 주도하는 것은 안산 선수 개인에 대한 지지와 열광일 뿐 백래시 그 자체에 대한 반대라고 하기도 어렵다. 허약한 먹잇감이 등장하면 페미니즘 사냥은 언제라도 재개될 것이다. 그것의 사회·정치적 조건을 해체하는 일이 중요하다.

안산이 지난 7월 30일 일본 도쿄 유메노시마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옐레나오시포바(ROC·러시아올림픽위원회)와의 2020도쿄 올림픽 양궁여자개인 결승전에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연합뉴스

안산이 지난 7월 30일 일본 도쿄 유메노시마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옐레나오시포바(ROC·러시아올림픽위원회)와의 2020도쿄 올림픽 양궁여자개인 결승전에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연합뉴스

‘남성혐오’라는 착각

‘혐오’라는 문제적 개념을 살펴보자. 이 개념은 다음 두가지를 뒤섞는다. 첫째는 차별과 폭력이라는 사회구조적 실재이고, 둘째는 타인을 미워하거나 경멸하는 감정의 표현이다. 민주주의 체제는 이 두가지를 엄격히 구별한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폭력과 차별은 무조건 나쁜 것이지만, 타인을 모욕, 비하, 조롱하는 행위는 때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 그런 행위가 차별을 지지하고 강화한다면, 차별 행위의 일종이므로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여성을 향한 비하와 조롱이 성차별 구조 내에서 발생할 때, 규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반면 사회적 약자가 지배집단을 향해 적대감을 드러내거나, 시민이 권력자를 조롱하거나, 개인이 다른 개인을 모욕하는 경우, 다양한 평가기준이 적용된다. 그럼 남성 집단 일반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행위는 어떻게 평가돼야 하는가?

세상은 남성 중심 권력이 지배하고 있으며, 이 권력은 여성을 차별하고 배제한다. 사회의 특정 영역에서 남성 개인이 차별받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거시적 관점에서는 그 역시 남성 중심 체제의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 사회 전체의 수준에서 차별받는 것은 여성이고, 성차별은 증오심, 적대감, 경멸, 조롱, 비하 따위를 동반한다. 반면 남성이 남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가 되지는 않는다. 즉 ‘남성에 대한 역차별’은 없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 기본적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어떤 여성이 온라인에서 한국 남성 일반을 비하하고 조롱할 경우, 그 개별 행위의 성격에 따라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성차별적 행위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남성을 차별하는 사회구조 내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남성비하, 남성조롱, 남성증오 등의 행위는 존재하지만, 남성차별이라는 것은 없다. 바로 이 지점에 ‘남성혐오’라는 기호가 개입한다. 이 말의 기능은 실재하는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혼동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즉 ‘남성 전체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여성이 있으므로 남성이 여성에게 차별받고 있다’는 착각을 만든다. 이제 자신이 차별의 피해자라는 믿음으로 무장한 남성들이 페미니스트 사냥에 나선다. 하지만 비하와 조롱의 피해자라고 해서 차별의 피해자인 것은 아니다. 더구나 비하와 조롱은 그 대상과 내용에 따라 허용될 수도 금지될 수도 있다.

안산 선수를 향한 공격은 명백한 차별 행위다. 그것은 여성의 외모와 언어에 ‘남성혐오’라는 낙인을 찍고, 남성 중심 권력에 순종하기를 요구한다. ‘혐오’라는 모호한 언어의 사회적 사용법에 이런 낙인찍기의 가능성이 내포돼 있다. 이 말은 차별적 사회구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차별 행위나 발언을 모두 의미한다. 그것을 쓰면 쓸수록 전자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후자만 강조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런 경향은 ‘여성혐오’의 사용에서도 드러난다. ‘여혐’이 ‘성차별’이나 ‘여성에 대한 차별 표현’ 같은 개념을 대체할수록 차별이라는 사회구조적 실재는 잊히고, 여성을 공격하는 개별 발언이나 행위에만 초점이 맞춰진다(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맥락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 ‘성차별 이슈’가 아니라, ‘젠더 폭력’, ‘젠더 이슈’라고 쓰는 경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누군가 타인을 미워하고 조롱하면,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혐오’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다. 그냥 ‘인터넷 트롤’ 수준의 말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여혐 논란’, ‘남혐 논란’ 따위의 언어가 넘쳐나고, ‘타인을 경멸하고 비하하는 행위는 혐오라 나쁜 것이다’라는 앙상한 믿음만 남는다. 이런 조건에서 ‘남성이 여성을 혐오하는 것이 나쁘다면, 여성이 남성을 혐오하는 것도 똑같이 나쁘다’라는 착각이 힘을 얻는다.

모호한 언어와 무능한 제도

이는 단지 언어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성차별을 다룰 공동체의 규범 자체가 매우 허약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런 규범을 만드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지만, 한국의 국가기구와 제도는 성(性)에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 무능하다. ‘손가락 고리 모양을 사용했으니 남성혐오’라는 황당한 주장을 반박하기는커녕 해명하고 사과하느라 바쁘다. 논란이 된 사건과 최대한 빨리 결별하고 비난 여론을 피하는 것이 제도의 기본적인 작동 방식이다. ‘미투 운동’이 여론을 주도하고, ‘n번방 사건’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을 때는 모두가 여성의 목소리에 집중하지만, 반페미니즘 난동이 힘을 얻으면 기업과 국가기관 모두 ‘남성혐오’라는 낙인을 피하려 노심초사한다.

정상과 비정상, 상식과 비상식의 구분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 구분을 만들고 실행하는 것이 국가의 첫 번째 임무다. 이런 구분이 단지 억압의 수단인 것만은 아니다. 진보란 정상성의 기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재 미국에서 성소수자는 정상이지만, 의사당을 점령한 백인 우월주의자는 비정상이다. 한국에는 “여성이 숏컷을 하고 ‘웅앵웅’, ‘오조오억’ 같은 말을 쓰면 남성을 혐오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주장하는 남성 집단이 있다. 이들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한국의 국가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입장도 언어도 없다. 그래서 황당한 음모론이 판치고, ‘여성혐오’와 ‘남성혐오’, ‘이대녀’와 ‘이대남’이 대결하는 식으로 사회적 논의가 전개된다. 우리편을 모아 상대편을 공격하는 것이 시민적 정치 참여의 유일한 방법이다. 언젠가 ‘여혐’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주류 여론이 되더라도, 그후에는 백래시가 다시 등장할 것이다. 해법은 이미 나와 있다. 국가기구와 제도가 제 역할을 하면 된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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