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이사회 의장은 상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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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이사가 의장 겸직 수두룩…‘퇴장’ 이후에 의장직 유지하기도

세계 최고 부호인 미국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7월 5일 아마존의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났다. 후임엔 아마존웹서비스(AWS)를 이끌어온 앤디 재시가 아마존의 새 CEO로 선임됐다. 아마존을 전 세계에서 시가총액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기업으로 성장시킨 베이조스가 경영 일선에서 한발 물러선 셈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앞으로 아마존의 경영을 뒤켠에서 지켜만 볼 것이라 보는 이는 없다. 그는 여전히 아마존 최대주주이며 이전까지 겸직하던 이사회 의장 자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5월 26일 인천 연수구 삼성바이오로직스에서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이사회 의장(왼쪽)이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 두 번째)와 의약품 생산 설비를 둘러보며 대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5월 26일 인천 연수구 삼성바이오로직스에서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이사회 의장(왼쪽)이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 두 번째)와 의약품 생산 설비를 둘러보며 대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면서 특히 경영진과의 균형을 맞추면서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춘 기업 이사회의 역할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국내의 대표적인 기업들에선 여전히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며 이사회의 ‘견제’ 임무를 다하지 못하게 하는 구조가 남아 있거나, 주주들의 이익에 반하는 경영으로 법원의 심판대에 오른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 자리는 유지하는 등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움직임이 더딘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이사회 의장 자리가 ‘상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변질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사회의 경영진 견제 취지 어긋나

7월 2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 부당합병 의혹 관련 공판에는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이사회 의장과 최치훈 전 삼성물산 이사회 의장이 출석했다. 김 의장은 삼성바이오로직스 상장 과정에서 회삿돈을 횡령하고 분식회계 관련 증거를 인멸한 혐의로도 기소돼 오는 9월 정식 공판이 예정돼 있다. 김 의장은 대표이사에선 물러났지만 겸직하고 있던 이사회 의장은 유지하고 있다. 최 전 의장은 2014년부터 삼성물산에서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다 2018년 대표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이사회 의장 자리는 유지했고, 지난 2월에야 임기 만료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공교롭게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경영권 불법승계’에 관련된 기업인들이 의혹이 제기된 후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도 이사회 의장직을 유지했던 것이다.

특히 김 의장은 5월 26일 민주당 지도부가 인천 연수구에 있는 삼성바이오로직스 공장을 찾아 현장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열었을 때 회의에 참석하며 생산 공정을 설명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한미 기업 간 모더나 백신 위탁생산 계약을 축하하는 취지로 마련된 자리였지만 삼성바이오로직스 관련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윤호중 민주당 원내대표로부터 “좋은 기업과 좋은 정치가 만나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발언까지 들을 정도로 해당 기업을 대표하는 자리에 나섰던 것이다.

기업 이사회는 기업 대주주나 기업에 소속된 경영진들의 독단적인 경영을 방지하기 위해 외부인인 사외이사까지 참가시켜 ‘견제와 균형’을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운영하는 기구다. 사외이사의 수가 사내이사보다 많도록 구성돼 있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는 이런 감시자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구조로 돼 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ESG 경영 바람이 불기 전부터 지배구조상의 허점을 최소한으로나마 막아내기 위해 이사회 운영을 투명하게 하는 제도적인 보완책은 계속 도입돼온 바 있다. 2019년부터 금융감독원이 기업 지배구조 관련 정보 제공 범위를 확대하도록 기업공시 서식 작성기준을 개정한 바 있고, 자산총액이 2조원 이상인 대규모 상장법인은 한국거래소에 기업지배구조 보고서를 의무공시하도록 하는 제도도 시행됐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주주들이 기업 경영을 더욱 투명하게 감시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점차 도입되는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이사회가 본래 취지를 다하기 위한 선결조건 중에는 대표이사의 이사회 의장 겸직 제한이 대표적이다. 제도적으로 지배구조 공개 방침이 확대됨에 따라 과거에 비해선 대표이사직과 이사회 의장직을 분리한 기업 비중이 크게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재계의 10대 기업집단 상장사 중 기업지배구조보고서 공시의무가 있는 101개 기업을 분석한 결과 지난해 연말 기준 이 두 직책을 분리한 기업은 전체의 27%로 집계됐다. 5년 전 14%에 불과했던 데 비하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네이버·카카오·쿠팡 등 사실상 오너 역할

그러나 10대 기업집단 중 이사회 의장을 따로 선임한 상장사가 전혀 없는 기업집단도 5개나 될 정도로 아직은 갈 길이 먼 상태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과 각 기업 공시를 통해 확인한 기업지배구조보고서에 따르면 현대차·롯데·한화·현대중공업·신세계는 상장 계열사 모두가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겸하고 있었다. 이들 5개 기업집단을 통틀어 41개 기업이 대표이사가 의장까지 맡는 관행을 유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삼성과 SK, LG는 비교적 겸직 비율이 낮아 각각 50%, 63.2%, 38.5%의 계열사에서 이사회 의장을 따로 선임한 것으로 나타났다. 포스코와 GS 계열사는 각각 1곳만 겸직 대신 분리를 실시해 이들 5개 기업집단에서 도합 27곳의 기업이 지배구조 개선에 비교적 높은 점수를 받는 모습이 드러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기업 지배구조 원칙에도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겸하지 않는 쪽이 이사회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투명한 경영을 촉진할 수 있다고 보고 권고사항에 포함돼 있다. 하지만 총수 일가의 입김이 여전히 강한 국내에선 두 직책을 분리하는 사항 자체가 오너의 결정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삼성이 삼성전자를 필두로 2016년부터 점차 두 직책을 분리 선임하는 추세를 계열사 내에 확산시켰고, SK도 2019년 최태원 회장이 그룹 지주사 의장직에서 물러난 이후부터 이런 흐름이 빨라졌다. 반면 여전히 대표이사가 의장을 겸직하는 현대차와 롯데 등의 기업집단에선 언제 변화가 나타날지 쉽게 예견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러한 현실은 미국 S&P 500 상장기업 중 53%가 겸직 방지 방안을 시행 중인 점과도 비교된다.

대기업 이사회 의장은 상왕인가

금융회사는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 제13조에서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원칙적으로 이사회 의장을 사외이사 중에서 선임해야 한다는 법적 제한을 받고 있어 겸직 방지 면에서 더 진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긴 하다. 다만 금융사 역시 사외이사가 아닌 자를 의장으로 선임하는 사유만 공시하고, 따로 선임사외이사를 둔다면 전처럼 사내이사의 의장직 수행이 가능하게 빠져나갈 여지가 있다. 이 때문에 10대 기업집단 계열사 중 금융사인 현대차증권·한화투자증권 등은 대표이사가 의장을 맡고 있다. 이 경우 겸직 사유를 공시하고 있지만 “효율적인 이사회 소집 및 회의 진행을 하기 위함”(한화투자증권)이라고만 짤막하게 공시돼 있어 법을 피해갈 구멍이 허술하게 열려 있다는 지적을 피하기 힘들다.

게다가 기업 경영 전반에 막대할 정도의 입김을 미치면서도 이사회 의장 자리로 한발 물러난 뉘앙스를 주는 창업자들도 이사회 의장의 제 역할과 부합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네이버와 카카오, 쿠팡 등은 의장이 사실상 오너 역할을 하거나, 창업자가 의장직에서는 물러났지만 경영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들이다. 이 경우 대표이사에게 명시적으로 부과되는 책임을 피하는 방책이 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최근 물류센터 화재 사고 직전 의장직을 사임한 쿠팡의 김범석 전 의장은 사임일자가 화재 사고 전이었음이 밝혀지기 전까지 책임 회피를 위해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또 사외이사로 관련 분야에서 전문성과 명망을 갖춘 인사를 선임하며 이사회를 구성하고는 있지만 실제 이사회에서 사외이사들이 경영진의 독단을 저지하는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지배구조보고서 공시 의무가 있는 대규모 상장기업에서 사외이사를 역임한 바 있는 한 교수 출신 인사는 “현실적으로 사외이사가 경영에 제동을 걸 만큼 내부 사정을 파악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소위 ‘거수기’ 역할을 하지 않고 제 목소리를 낼 만한 여지도 별로 없는 것은 사실”이라며 “그럼에도 사외이사가 기업의 공익활동을 위한 제언이라도 할 수 있고 어느 정도는 이런 의견이 반영되기도 한다는 점은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원칙상 사외이사가 의장 맡아야

이러한 현실적 한계 때문에 기업지배구조보고서 공시 내용 중에는 감사부서의 독립성을 확보했는지 여부를 평가하는 항목도 포함된다. 최근 ESG 경영 바람이 불면서 이사회 직속으로 ESG위원회를 꾸리는 일부 기업에서도 내부 감사활동을 철저히 수행해 대외적 투명성을 높인다는 방침을 천명한 곳도 늘고 있다. 다만 코스피 시가총액 기준으로 상위권에 올라 있는 기업들의 지배구조보고서를 검토해보면 실제 해당 항목을 준수하고 있는 기업의 비율은 높지 않다. 이사회보다 기업 내부의 사정을 잘 알고 내부 부정행위를 감독하는 역할에 전념할 수 있으려면 감사부서가 충분한 독립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한국거래소 규정에 따른 지배구조 15개 핵심원칙 중 ‘감사위원회의 인사평가·인사이동 동의권 행사’ 항목을 보장한 기업은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사회의 이사들을 선임하는 주주들의 권리 또한 보장되지 않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권고하는 대로 주주가 주주총회에 참석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선 다른 기업과 겹치지 않는 날을 지정해 적어도 4주 전에는 소집공고를 내야 하지만 이를 지키는 기업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이른바 여러 서로 다른 기업의 주주총회가 집중되는 ‘슈퍼주총데이’에 주총이 몰리는가 하면, 소집공고를 내는 시기도 2주 전에 내는 관행이 일반적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방지’(셀트리온)한다는 등의 이유로 주총 일자를 재검토할 필요가 없다고 밝힌 기업이 대부분이었다.

경영계 일각에서는 대표이사가 주도하는 이사회가 보다 신속하고 효율적인 경영지침 수립과 실행에 일조한다는 목소리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ESG 경영을 표방하고 나선 기업들이 주주와 소비자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한 형식적인 기구조차 제대로 운영하지 않는다면 더욱 거센 역풍을 부를 수 있다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정재규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선임연구위원은 “기업 이사회는 제대로만 운영되면 단순한 거수기가 아니라 소수 경영진의 독단을 견제하고 보다 균형 있는 기업 경영을 실현하는 실질적 역할을 다할 수 있다”며 “물론 대표이사가 의장까지 겸하는 이전까지의 방식에 단점만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대표이사 외의 사내이사가 의장을 맡는 등 보다 중립적인 운영을 해나가며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대안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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