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심하고 늙고 싶다 우체국의 ‘할머니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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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할머니 현상’이라고까지 부를 만하다. 2030 여성들이 자신의 꿈을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다’라는 방식으로 밝히는 일 말이다. 예컨대 30대 초반의 유튜버이자 마케터 ‘굿수진’은 운동 영상을 올릴 때마다 “섹시한 할머니가 되고 싶어”라고 밝히고 게시물엔 꼭 ‘#섹시한할머니’를 해시태그한다. 열심히 운동하며 즐겁고 당당하게 살고 싶다는 삶의 태도를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영화 <어른이 되면>이 개봉한 2018년 7월 당시 다큐멘터리 감독이던 장혜영 의원(오른쪽)과 동생 혜정씨 / 김영민 기자

영화 <어른이 되면>이 개봉한 2018년 7월 당시 다큐멘터리 감독이던 장혜영 의원(오른쪽)과 동생 혜정씨 / 김영민 기자

할머니가 되고 싶다니. 늙는 것은 최대한 피하고 싶은 일인 줄만 알았는데, ‘100세 시대’를 피할 수 없으니 즐기기로 한 것일까? 삶에 대한 자신만의 태도와 철학을 가지고 긴 세월을 버텨온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알려진 덕분인 것일까?

최근 몇년 출간된 여성 저자의 에세이 제목을 참고한다면, ‘할머니’를 모성애와 헌신의 화신, 추억과 노스탤지어의 주요 소품으로 그려온 이전의 산문과 비교해 분위기가 확 달라진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일단 할머니는 대상이 아니라 주인공 혹은 롤모델이다. 무루 작가의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어크로스·2020년 5월), 김원희 작가의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달출판사·2020년 8월), 김두엽 작가의 <그림 그리는 할머니 김두엽입니다>(북로그컴퍼니·2021년 5월) 등이다.

나는 ‘할머니 현상’의 시초를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2018년 내놓은 노래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로 꼽고 싶다. 이 노래는 장 의원이 작사·작곡해 18년 동안 시설에서 살았던 발달장애인 동생 혜정을 데리고 나와 함께 사는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에 담았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 당하지도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 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는 ‘어떤 할머니’를 언급하기에 앞서, 다르다는 이유로 어떤 이들을 쉽게 배제하는 사회에서 장애가 있는 동생과 죽지 않고 살아가는 일 자체가 가능한지를 물었다.

기후위기를 체감하며 사는 1020 여성들은 장 의원이 내놓은 저 문장을 진지하게 곱씹는다. 인스타그램에서 ‘기후위기’로 검색하면 세계 곳곳을 덮치는 기후 재앙을 목도하며 ‘할머니가 될 수 있는 걸까’ 고민하는 이들의 게시물을 쉽게 볼 수 있다. 어쩌면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어’라는 말은 전 지구적 위기를 살아남아 생존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임을 방증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치열한 경쟁과 성과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나만의 기준을 가지고 즐겁게 살아낼 것임을 다부지게 다짐하는 말이기도 하다.

‘멋진 할머니로 안심하고 늙고 싶다.’ 이 문장은 지난 6월 <우체국과 사람들>에 실린 생활 속 우정 서비스 체험수기 제목이다. 50대 여성 박민정씨는 택배(이제는 소포라고 부른다)를 부치러 우체국에 들렀다가 ‘무배당 우체국치매간병보험’ 안내판을 보았다. 중증 치매로 최종 진단이 내려지면 평생 간병 생활자금을 지급하는 상품이다. 그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중에 최고가 미래에 대한 안심 아닐까요?”라는 직원의 말에 무릎을 ‘탁’ 치고 신청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레드카펫 밟은 윤여정 배우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는 박민정씨가 자신의 피아노 반주에 팝송과 트로트를 신나게 부르는 꿈을 꼭 이루길 바란다.

<최미랑 뉴콘텐츠팀 기자 r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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