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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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냉전이 미소 군비경쟁이었다면, 21세기 신냉전은 미중 패권경쟁이다. 그중에서도 반도체를 둘러싼 양국의 경쟁은 현재 미중 갈등의 최전선에 위치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글로벌 반도체 회사의 최고경영자들에게 미국으로의 반도체 투자를 종용했고,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에서 가장 화제가 된 것도 삼성의 미국 파운드리 투자였다. 당장 세계 반도체 시장은 공급 부족에 시달리고 있고, 이는 미국의 국익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다. 게다가 반도체는 민군 겸용의 기술이다. 즉 미국은 중국이 반도체 굴기에 성공할 경우, 미국에 큰 위협이 된다고 본다.

반도체 경쟁이 미중 갈등의 최전선인 상황에서 국내 대권후보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비전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진은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반도체 클린룸 내부 / 경향신문 자료사진

반도체 경쟁이 미중 갈등의 최전선인 상황에서 국내 대권후보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비전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진은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반도체 클린룸 내부 / 경향신문 자료사진

반도체 업계는 글로벌 공급망으로 움직인다. 원료, 제작기계, 생산 등의 공정과정이 미국, 대만, 한국, 중국, 일본, 네덜란드 등의 글로벌 공급망을 통해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 공급망에서 중국을 디커플링, 즉 고립시키려 한다. 중국이 무역자유화 이후 구축해온 중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뒤집겠다는 것이다. 완전한 디커플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대다수의 주장이지만, 안보 문제를 고려하면 디커플링을 반드시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중요한 건 한국이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과학기술정책에 둔감한 한국 정부지만, 삼성 등이 얽혀 있는 반도체 문제에선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핵심 산업에서 초격차 기술력을 확보해 글로벌 공급망의 허브로 도약할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해 전문가는 물론 장관조차 뚜렷한 방안을 내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한국의 공무원들은 ’K반도체 벨트’를 만든다는 홍보자료를 뿌렸다. K라는 글자에 대한 집착은 이제 역겨울 정도다. 그나마 현 정부가 반도체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건 알겠다. 문제는 다음 권력을 쥐게 될 대선후보들이다.

여배우와 쥴리 그리고 내수용 정치인들

미중 패권경쟁 뉴스는 한국사회에서 그다지 뜨거운 감자가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뉴스는 대선후보의 여배우 스캔들과 배우자의 과거 행적이다. 국제정세야 어떻든 간에 한국의 언론은 조회수가 잘 나오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정치뉴스를 띄운다. 언론이 이끄는 대로 소위 시사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역군들이 움직이고, 국민은 그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인식하게 되는 악순환, 모두의 시선을 국내정치의 좁은 울타리에 가둬놓는 이 지긋지긋한 악순환의 고리가 지금 대선과 맞물려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유력 대권후보의 이름과 반도체로 뉴스를 검색하니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서울대 반도체연구소를 방문했다는 소식이 보인다. 카이스트를 방문해 탈원전 관련 간담회를 열었고, 안철수를 만나 탈원전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의 대선 출마선언문에서 과학기술이라는 단어는 딱 한 번 등장한다. 물론 진부한 수준이다. 국제사회의 변화와 이를 기술혁명과 연결시킨 부분은 인상적이지만, 탈원전 등의 정치적 프레임으로 과학기술에 접근하는 그의 태도를 보면, 급변하는 기술혁신 시대와 이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변화에 대한 공부가, 과연 국내정치에 대한 공부보다 얼마나 잘돼 있는지 확신하기 어렵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뜬금없이 우주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오랫동안 자신의 브랜드로 각인시켰던 기본소득 대신 경제성장에 방점을 찍고 있는 그는 “자동차, 조선, 반도체 산업이 우리 경제를 일으키고 운명을 개척했듯, 대한민국의 우주시대, 이제 상상 속의 먼 미래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내뱉는다. 강력한 민주당 대권후보가 우주에 관심을 갖는 건 좋은 일이다. 그의 출마선언문에도 과학기술은 딱 한 번 등장하는데 미래형 인적자원 육성시스템이라는 화두와 함께다. 역시 전혀 새롭지 않다. 세계라는 단어는 두 번 등장하는데, “세계 속 문화강국”이라는 말과 “세계 최고의 빈곤율”이라는 단어와 함께다. 과학기술에 대한 그의 관점은 “소부장 자립에서 일본을 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발언이나, “우리는 ‘신기전’을 만든 민족이니 우주과학 발전도 기대한다”는 발언 등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재명의 정치에서 국제정치와 과학기술은 중요한 화두가 아니다. 그도 내수용 정치인이다.

국제정치의 패권과 과학기술

국제정치의 패권과 기술혁신의 관계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배영자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과학기술 혁신을 세계 정치·경제 질서 형성의 내재적 변수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18세기 증기기관의 발명과 면직물 생산의 증가는 나폴레옹 전쟁의 기폭제가 됐고, 19세기 초 철도와 철강산업의 발달로 독일통일과 미국의 남북전쟁이 벌어졌다. 이후 전기 및 무기화학의 발달이 세계대전을 이끌고, 자동차, 석유화학의 발달은 미소 냉전으로 이어졌으며,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은 소련의 붕괴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이제 세계는 디지털 대전환을 향해 달리고 있고,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국제질서의 변화 또한 그런 기술혁신의 발전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

2003년 김기정과 정우탁은 <과학기술과 국제정치: 신국부론의 국가전략에 관한 연구>라는 정책자료집을 냈다. 저자들은 한국이 미래지향적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입국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국가형태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기술의 정책이 결국 새로운 시대 국가의 발전과 번영을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이 아시아·태평양 공동체를 지향하는 외교전략을 통해 과학기술의 국제정치, 기술경제안보 전략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연구국가’로의 입국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연구국가란 “국가의 주된 기능이 과학기술적 지식을 축적할 수 있는 교육·연구기관의 유기적 결합 그리고 그것을 산업 분야로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는 국가 시스템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선 첨단 과학기술의 지식을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돼야 하며, 훌륭한 과학기술 인재를 육성하고 대우하고 초빙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훌륭한 연구개발 정책이 고려돼야 하며, 연구개발의 과정과 결과를 국민에게 알리고 활용하며 국가 차원의 거대한 연구개발에 관한 균형적 조정능력을 키워야 한다. 이 보고서가 나온 2003년 이후, 이 전략을 정확히 따라간 나라는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우린 지금 그 결과를 목도 중이다.

21세기 새로운 정치권력은 국제적 감각을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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