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파우치 박사 대 폴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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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싸우는 과학

“지금 여기서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그건 의원님입니다.”

미국 코로나19 관련 대응 최고 책임자인 앤서니 파우치 박사 / AP연합뉴스

미국 코로나19 관련 대응 최고 책임자인 앤서니 파우치 박사 / AP연합뉴스

지난 5월 11일 앤서니 파우치 박사가 미 의회의 청문회에 등장했다. 미국 국립보건원이 중국 우한바이러스연구소의 실험에 지원했느냐는 문제를 두고 공화당 랜드 폴 상원의원은 파우치 박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추궁했다. 미국 국립보건원이 비영리기구를 통해 중국 우한바이러스연구소를 지원하기로 했던 건 사실이지만, 현재 이 결정은 중단됐다는 파우치의 발언에 폴 의원은 인신공격으로 대응했다. 공화당은 여전히 코로나19의 우한바이러스연구소 기원설을 주장하고 있지만, 파우치 박사는 이 입장에 신중하게 대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 의원은 파우치 소장과 국립보건원이 지원한 연구비 때문에 전 세계에서 수백만의 희생자가 나왔다는 음모론을 폈고, 파우치 박사는 폴 의원을 향해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그건 폴 의원 당신”이라는 말로 자신의 분노를 표현했다.

80세의 고령인 앤서니 파우치는 평생 감염병 연구를 수행해온 과학자다. 그는 국립보건원장이 될 자격이 충분한 인물이었지만, 보건원 산하 알레르기감염병 연구소장직에 만족하며 과도한 정치적 야망을 꿈꾸지 않았다. 최근 팬데믹 초기에 파우치 박사가 다양한 사람들과 주고받은 개인 e메일 3000페이지 분량이 전부 공개됐다. 이 방대한 e메일의 내용은 파우치라는 과학자가 얼마나 충실하게 자신의 직분에 임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자, 트럼프라는 최악의 대통령과 팬데믹이라는 사태를 맞이한 과학자가 사회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투쟁했는지를 증명하는 역사적 기록이며, 또 부패한 정치와 혼돈으로 가득한 사회 속에서 과학자가 보여줘야 할 과학적 태도의 기준을 제시하는 청사진이다.

과학적 태도는 어떻게 정치를 이겨내는가

팬데믹 초기, 미국사회는 마스크 착용을 두고 혼란에 휩싸였다. 파우치 또한 초기엔 바이러스가 투과할 수 있는 마스크의 착용이 감염을 막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친구들의 조언과 여러 과학적 증거를 통해 그는 태도를 바꾼다. 이제 파우치는 마스크 착용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과학의 체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과학자는 과학적 삶의 양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한다. 과학에서 잘못된 이론이 새로운 데이터에 의해 수정되는 건 흔한 일이다. 과학자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면, 자신의 이론을 수정해야 한다는 태도를 그의 연구현장에서 배운다. 마스크 착용에 대한 전 세계 보건전문가들의 태도는 대부분 파우치 박사와 겹친다. 과학은 의심하는 태도에서 출발하지만, 신중함을 잃지 않으며, 결국 재현되는 데이터에 손을 들어주는 체제다.

우한바이러스연구소 기원설에 대한 그의 입장은 신중하다. 그는 우한바이러스연구소 기원설을 재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지만, 이를 확신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조사에서 증거가 나오지 않자, 그는 코로나19가 자연발생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말했다. 흔히 과학은 확실함을 의미하지만, 실제로 과학연구를 수행하는 전문가들은 실험실에서 확신보다 신중함을 먼저 배운다. 하나의 실험이 시공간을 넘어 계속 재현될 때에서야 과학자는 확신을 갖게 된다. 어쩌면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배우는 이 태도는 우리 삶 속에서도 상식일 것이다. 단 한 번의 실험으로 확신하지 말라. 이론에 대한 신념보다 데이터를 존중하는 태도를 기르라. 하지만 반복되는 데이터에 대해서는 신뢰하라. 과학자는 불확실성과 확실성 사이에서 신중함과 확신이라는 태도 사이를 오간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우리가 과학을 오해하게 되는 가장 흔한 이유다. 과학 외부에 있는 이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이 태도야말로 과학자들에겐 당연한 상식이다. 파우치 박사의 e메일은 과학적 태도가 어떻게 정치를 이겨낼 수 있는지에 대한 훌륭한 본보기다.

과학은 정치와 싸워야 한다

최근 그는 백신 접종에 관한 정치적 입장 차이를 없애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은 현재 민주당에 대한 불신과 반감으로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 접종률이 높은 지역은 민주당, 낮은 지역은 공화당 주로 나뉜다. 바이러스는 민주당 지지자와 공화당 지지자의 차이를 모른다는 말로 파우치 소장은 미국이 처한 상황을 경고했다. 정치가 과학의 조율을 거부하고 과학적 태도로 시민을 설득하지 못하는 상황, 그것이 현재 미국이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사태에서 마주한 본질이다. 과학과 정치는 반드시 서로 조율해야 한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올해 1월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과학의 귀환’을 외친 건 앤서니 파우치 같은 과학자가 미국을 코로나19로부터 구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국민의 68%가 파우치 박사를 신뢰한다. 대통령보다 높은 지지율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상식의 보루엔 과학이 있다.

과학이 정치와 싸워야 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낯설다. 한국의 유명한 과학자들은 대중강연을 통해 과학을 재미있게만 설명해왔기 때문이다. 과학을 경제발전의 도구로만 생각했던 한국정치의 시각과 과학을 신기한 학문 정도로만 생각하는 한국 대중의 시각이 만나 과학은 한국사회에서 버려졌다. 우리에겐 당당하게 정치인에 맞서 과학적 태도를 내세우는 과학자가 없다. 과학이, 그리고 과학자가 정치와 연결될 땐 언제나 세계적 연구업적이나 기업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시공간에서 시야를 조금만 넓혀보면, 우리는 사회의 더 나은 발전을 위해 자신의 작업이 지닌 사회적 맥락을 끊임없이 고민했던, 나아가 고민과 반성을 넘어 지식인으로 사회변화를 위해 실험실 밖으로 활동의 영역을 넓혔던 과학자들을 만난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 계몽주의를 통해 시민사회의 대각성을 이끌어냈던 백과사전의 저술가들, 19세기 사회개혁을 위해 우생학과 싸우던 과학자들, 20세기 영국에서 사회주의의 등장을 주시하며 과학적 사회를 위해 실험실과 대중을 넘나들며 싸우던 과학지식인들, 그리고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정치적으로 각성한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민중을 위한 과학운동’은 모두 그런 전통을 대변한다.

생물학자이자 활동가 존 벡위드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과학자가 생산적인 과학 경력을 쌓아가면서도 동시에 과학과 관련된 사회적 활동가가 될 수 있음을 밝히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많은 과학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과학자는 활동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정치와 싸워야 한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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