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동-가볍고, 경쾌, 유쾌, 청춘의 여백과 쉼표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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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세권이란 말처럼 지하철역은 생활과 지역문화의 중심이 됐다. 서울 마포구 합정역은 출구마다 다른 표정의 골목으로 이어진다. 대체로 합정동의 대부분이 합정역 생활권에 포함되지만, 동쪽과 남쪽 방면으로 당인동과 상수동, 북쪽으로는 서교동과 홍대 입구까지 그 생활문화권이 확장된다. 양화로를 사이에 두고 동과 서의 골목길이 눈에 띄게 다르고, 독막로를 경계로 남과 북은 완연히 다른 풍경이다.

잘 꾸민 가게들은 명소가 되어 젊은이들을 끌어모은다.

잘 꾸민 가게들은 명소가 되어 젊은이들을 끌어모은다.

합정역 일대에서 가장 붐비는 곳은 5·6번 출구와 이어진 서교동과 홍대 근처로 통하는 골목길이다. 골목 입구부터 온통 식당과 식당의 간판 메뉴판들이 이어졌다. 오후 시간인데도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있어 코로나19 팬데믹에 지친 다른 골목길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부지런히 약속장소를 향해가는 젊은이의 대화가 들린다. “홍대 입구보다 이 동네가 더 낫다. 비슷하지만 그래도 이쪽이 덜 상업적이라 요즘은 합정동에서 주로 모인다”는데 상업적이기는 홍대와 별 차이가 없는 듯하지만, 식당과 카페로 이어진 골목에 간간이 일터와 사무실들이 있고 주택가가 이어지는 모습이 달라보인다. 군데군데 여백과 쉼표가 있는 셈이다.

식당이 끝날 무렵 온갖 분위기로 치장한 카페들이 보인다. 멋짐과 세련됨을 자랑하는 경연장인 듯 젊은 감각이 펼쳐지고 있었다. 골목길 가게의 주인들은 얼핏 30대가 많아 보인다. 가게 앞에서 심각하게 업자 또는 거래처와 통화를 하는 주인들의 모습을 쉬 보게 된다.

힙한 클럽 골목도 인기가 높다.

힙한 클럽 골목도 인기가 높다.

골목 안 출판사, 붙박이 주인공

골목길 사이사이 작은 출판사가 있고, 또 출판사에 기댄 편집회사들이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합정역에서는 파주출판단지로 곧장 이어지는 직행버스도 있다. 급하게 일감이 오가고 사람도 오가며 일하는 동네라 골목 안 출판사들은 이 골목의 붙박이 주인공이다.

아주 작은 집 낮은 지붕의 옛집을 말끔히 칠하고 고쳐 담 사이로 열심히 일하는 편집자의 눈빛과 문득 마주치는 곳이 이 골목길이다. 얼마나 심각하거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다듬고 있을까. 저 작업의 결과물은 어떤 것일지 알고 싶지만, 행인은 바쁘게 골목을 지나쳐 간다.

밤이 되기 전부터 클럽 입장을 받는다.

밤이 되기 전부터 클럽 입장을 받는다.

편집 프랜차이즈 전문점이라는 색다른 간판을 단 작업 공간도 보였다. 편집도 햄버거를 만들 듯 격에 맞춰 뚝딱 만들어준다는 것일까. 벽에 장황한 설명과 광고를 붙여 두었지만,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눈에 띄는 편집회사들은 아마도 잘 나가는 듯 자기 건물을 가지고 있거나 잔뜩 멋을 부린 사무공간을 두고 있었다. 출판시장이 그다지 크고 활발하지 않다는 우는 소리만 듣다가 번영하는 출판 관계회사들의 모습은 의외로 다가왔다.

인형의 집이 연상되는 고운 가게들엔 젊은이들의 옷을 걸어두고 손님을 부른다. 길가에 내놓은 진열대와 옷걸이를 보고 잠깐 발길을 멈추고 찬찬히 살펴보거나 안으로 들어서는 젊은 손님들이 보인다. 이곳 골목은 역에서부터 먹고, 마시고, 쉬고 입는 옷을 고르는 상권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합정역 일대는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골목 중 한 곳이다.

합정역 일대는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골목 중 한 곳이다.

홍대 거리와 이어진 소위 주차장 거리라는 곳에 이르면 그야말로 홍대나 이곳이나 비슷한 모습이다. 좀더 샛골목으로 들어가면 옷차림새부터 힙한 청춘들이 골목 안에 대충 앉아 주인 행세를 한다. 이 골목은 소위 클러버들의 영역이다.

클럽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골목이 끝날 때쯤 늦은 오후부터 손님을 맞는 클럽이 보인다. 아주 애송이인 손님 몇이 몰려오자 열심히 주민증을 검사하고 열을 체크한 후 들여보낸다. 팬데믹 사태 이후 살아남은 클럽은 오후에 문을 열고 10시면 문을 닫는단다. 감염병이 젊은이의 노는 시간까지 정해주었다. 클럽이 있는 골목은 합정동 인근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었지만 질서와 무질서가 혼재한 모습이다. 정처 없고 충동적이며 혼란스러운 젊은 영혼의 모습을 고스란히 닮아 있는 것일까. 영역은 그 길을 걷는 이들의 마음조차 닮는지 모른다.

상수동에는 한적한 분위기의 카페 골목이 있다.

상수동에는 한적한 분위기의 카페 골목이 있다.

합정역부터 이어진 골목길에 이 시대 젊은이들이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으며 노는지 잘 알 수 있도록 펼쳐져 있었다. 그 사이 간간이 아이돌을 내세운 기획사 건물도 보이고, 문화상품을 만드는 출판사와 디자인 회사도 보였다. 그곳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이 카페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일하는 모습도 보인다. 단지 젊은 분위기가 좋아 유람온 청춘들도 있다.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를 몸으로 실천하는 클러버도 보인다. 일하고 쉬고 노는 곳으로 이곳만 한 곳이 없어보인다.

일하고 쉬고 노는 곳

서울엔 젊은이가 모이는 동네가 여럿 있는데, 저마다 특징이 있다. 합정역 일대는 좀더 가볍고 경쾌하고 유쾌하다. 일터와 놀이터가 붙어 있고, 놀기 위해서만 모이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젊은이의 나름 살아가는 골목이기 때문이리라.

골목이 극동방송과 만나 남으로 꺾어 상수역 방향으로 길을 틀면 분위기는 좀더 굳어진다. 서교동 골목의 활기와는 거리가 있다. 축대 위 오랫동안 장사하던 민속주점은 문을 닫았다. 막걸리도 산뜻한 카페에서 퓨전 메뉴와 함께 마시는 시대이니 낮은 촉수의 전등 아래 낙서 빼곡한 어두운 분위기를 좋아할까 싶었다.

골목 곳곳에서 출판사와 출판 관련 가게들을 만날 수 있다.

골목 곳곳에서 출판사와 출판 관련 가게들을 만날 수 있다.

상수동 사거리에서 남으로 이어진 골목은 조용한 카페들이 뜨문뜨문 보였다. 어떤 곳에선 예술영화인지 뮤직비디오인지를 찍는 듯 진지한 스태프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보인다. 지나치던 행인은 “여긴 맨날 촬영이다”라고 했다.

상수동에서 더 나가면 예전 당인리라 부르던 당인동이 있고 한강이 나온다.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였던 당인리발전소는 이제 지하로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에 발전소가 있을까 싶지만 땅 밑에는 아직도 발전기가 돌아간다. 상수동과 한강 사이로 발전소에 석탄을 실어나르던 기찻길이 있었다. 지선이던 당인선 철길이었는데 그 흔적 또한 지워졌다. 합정동에는 철도노동자들의 관사가 있었는데, 1930년대에 100호 넘게 지었던 것이 1960년대 말까지도 건재했다. 지금 철도관사 자리는 대부분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다.

상수동은 고요했다. 골목 하나가 통째로 카페가 줄지어 들어선 골목도 있었으나, 대체로 조용조용한 분위기다. 길 건너편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케이크 전문점이며 양식집과 커피집들이 있고 가게 주인과 일하는 이들 모두 젊었다.

골목 중간쯤 지역주택조합 추진위원회 간판이 보이고, 그 바로 옆으로 “지역주택조합 가입을 신중히 판단하세요”란 현수막이 걸렸다. 골목 안엔 반대하는 이유를 세세히 써 붙인 유인물도 보인다. 대충 살펴보자니 이 일대를 재개발해 36층짜리 아파트를 짓겠다는 것인데, 계획의 실현성을 의심하며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지난해부터 조합추진 소문이 돌면서 상수동 당인동 일대 카페 골목 가게들의 재계약도 어려워져 동네 상권의 침체로 이어져 걱정스럽다는 이야기다.

합정역 일대는 서울 시내에서 대표적인 젠트리피케이션 지역으로 꼽힌다. 홍대부터 시작된 잘 나가는 상권 개발과 임대료 상승, 기존 상인이 밀려나는 사태는 주변까지 번져 결국 상수동 당인동까지 이어졌고, 멀리 성산동까지 진행형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거기에 겹쳐 재개발까지 들고나왔으니 골목 안의 평화는 겉모습일 뿐이다.

오래된 주택가가 골목을 지키고 있다.

오래된 주택가가 골목을 지키고 있다.

합정역 주변 큰길가는 현대식 고층 건물이 휘황한 모습으로 우뚝 섰다. 상대적으로 개발이 처졌다고 생각하는 부동산 개발업자들이나 주민들은 이 오래된 동네를 지워버리고 한강이 내다보이는 엄청 비싼 초고층 아파트를 짓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다. 그러나 그 개발의 이익이 누구에게나 공평히 돌아가지 못하니 불만과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피해갈 수 없는 젠트리피케이션

골목 안에 한가한 노인 여럿이 앉아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노인 여럿은 “아니 왜 백신은 안 맞았어? 귀가 얇아 누가 맞지 말란 소리를 들은 게지. 주사 안 맞으면 어쩔라고 그러냐”고 다그쳤다. 주눅 든 한명이 “이달 말쯤 맞을 거야. 그때 수술해서 안 맞은 거지, 맞기 싫은 게 아니라니까”라고 열심히 변명했다. 코로나19의 그림자는 이 골목 깊숙한 곳도 빼놓지 않고 훑어 지나가고 있었다.

이 일대 골목길을 돌아다니면서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큰길가는 모르겠으나 홍대 쪽으로나 상수동 합정동 뒤편 골목에는 그 흔한 편의점 보기도 힘들었다. 동네 구멍가게야 어디서도 보기 힘들어져 그렇다 쳐도 작은 편의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의문이다. 사람들은 열심히 골목길을 오고 가는데, 그들은 음료수 한병, 사탕 한봉지는 어디서 사나 싶었다. 넘치는 식당과 카페와 술집들 사이로 편의점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의문이다.

합정동 주택가 골목에도 작은 출판사들이 보인다.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드는 곳답게 그들은 조용히 박혀 있지 못했다. 크게 벽화를 그려 자기 존재를 드러내거나, 색다른 분위기와 간판으로 눈길을 끌었다. 골목 안에는 출판사와 사무실에서 쓰는 복사기며 프린터 따위를 잔뜩 내놓고 수리하고 있는 업체도 보인다. 노인의 집 차고 한편에 충청도 어디쯤에서 지은 쌀을 가져다 직접 파는 직판장도 열었다. 허리 굽은 노인네는 골목을 훠이훠이 걸어나가 길가 과일 파는 트럭 옆에 앉아 자식 흉을 보고 있었다. 골목 안에 그의 이야기에 맞장구쳐줄 이가 이제는 없는가 보다.

젊은 시절은 혼란스럽고 흔들리고 앞이 보이지 않아 불안하다. 하지만 또 아름답고 힘차며 용기를 잃지 않는 때이다. 젊은이는 두려워하지 않아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 합정역 부근 골목길은 그런 젊은이들로 가득 찼다. 그들이 모이고 고뇌하고 즐기고 시간을 보내는 지역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모두 세련됐고, 여유롭고 똑똑하며 멋지다. 합정역 부근은 젊은 그들과 함께 골목길을 걸을 수 있어 반갑고 즐거운 곳이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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