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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학대를 겪고 어른이 된 이들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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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학대 트라우마는 ‘사적인 고통’이 아니다. 사회가 아동학대를 용인했기에 피해자가 된 이들은 상담실의 문턱을 넘는 일조차 힘겨워한다. 사람마음은 이들을 위한 시민모금을 시작했다.

아동학대를 범죄로 분명히 규정한 것은 2014년 시행된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부터다. 당시에도 최근과 같이 잇따른 아동학대 사망사건이 사회적 공분을 자아내면서 법과 제도의 변화를 이끌었다. 그 이후 아동학대 신고건수는 꾸준히 증가추세다. 학대행위가 늘어나서가 아니라 학대를 학대라고 말할 수 있게 돼서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진다. 아동학대가 범죄라는 인식조차 없을 때 학대를 겪으며 성장한 아이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트라우마치유센터 ‘사람마음’의 이한별 임상심리전문가(왼쪽)와 천명자 활동가가 센터를 소개하는 팸플릿을 들고 있다. / 박희정 기록활동가 제공

트라우마치유센터 ‘사람마음’의 이한별 임상심리전문가(왼쪽)와 천명자 활동가가 센터를 소개하는 팸플릿을 들고 있다. / 박희정 기록활동가 제공

“학대로 너무 이른 죽음을 맞은 아이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아이들이 학대로부터 살아남아 어른이 돼요. 어른이 된다는 건 학대 생존자에게 어떤 면에서 다행스러운 일이죠. 자신을 보호할 힘도 좀 더 생기고 학대자를 떠날 수도 있어요. 그러나 많은 생존자는 어른의 삶을 살아갈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은 채 학대의 후유증을 안고 어른이 돼버립니다.”

민간 트라우마치유센터 ‘사람마음’

임상심리전문가 이한별씨는 2012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비영리 트라우마치유센터 ‘사람마음’에서 그렇게 ‘살아남은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아동기 학대를 경험한 성인들은 사람마음을 찾는 트라우마 생존자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아동학대는 복합트라우마(complex trauma)의 성격을 지닌다. 복합트라우마란 탈출이 어렵거나 불가능한 상황에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트라우마 사건에 노출되는 것이다.

아동 청소년기에 장기간 겪은 폭력이나 방임은 사람의 정체성이나 문제 해결방식, 대인관계, 정서조절 능력이나 역량에 지속적이고 만성화된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 아동기 환경은 그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느냐에 영향을 미치는데, 학대를 겪은 사람은 오직 학대로부터 생존하고 적응해내는 과제에 자기 삶을 맞추어야 한다.

트라우마치유센터 ‘사람마음’ 입구의 현판 / 박희정 기록활동가 제공

트라우마치유센터 ‘사람마음’ 입구의 현판 / 박희정 기록활동가 제공

“물론 각자가 상황에 적응하는 방식은 다르기 때문에 한가지로 이야기하기는 어렵죠. 예를 들어서 대인관계의 어려움이라 하더라도 모든 관계에서 고립되고 아무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적당한 거리나 경계 없이 위험할 수 있는 관계에 몰두하는 식으로 적응하기도 해요.”

그러나 이한별씨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것은 이들이 만성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생존자가 상담기관의 문턱을 넘는 일에서부터 큰 용기를 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은 마음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렵게 상담을 시작한 생존자들이 치료에 대한 의지와는 무관한 이유로 탈락하는 일이 발생한다. 상담비용이라는 벽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엔 아동학대로부터 생존한 성인을 위한 공적 자금이 체계적으로 마련돼 있지 않다.

경제적 상황 고려 상담비 차등 책정

사람마음은 내담자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 상담비를 차등 책정한다. 가령 경제상황이 어렵다면 기준에 따라 가능한 비용을 내는 식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최소한의 상담비를 내도록 한다는 원칙이 있다. 트라우마 치유 과정에서 내담자 또한 참여자이자 협력의 주체이고, 한 번도 우선순위가 되지 못한 자신의 회복과 건강을 위해 투자하는 건 가치 있는 일이다. 다만 주 1회 상담주기를 고려할 때 적은 상담비도 어떤 이에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이 부담은 단지 경제상황의 문제만은 아니다.

“여기 오시는 분들은 처음에 ‘내가 이런 지원을 받아도 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세요. 트라우마 경험 이후 삶이 ‘생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생존이 아닌 다른 일에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는 것에 대한 망설임이 있는 거죠. 또 학대환경에서 오래 있다 보면 내가 무언가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을 갖게 되거든요. 그러면서 초기에 상담에서 탈락하는 비율이 높아요. 상담 초반에 관계를 잘 형성하면서 내담자가 갖는 이런 생각이 트라우마의 영향이고 상담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거라고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 기간에는 상담에 대한 장벽을 최대한 낮춰야 하는 거죠.”(이한별씨)

트라우마치유센터 ‘사람마음’의 홈페이지 / ‘사람마음’ 캡처

트라우마치유센터 ‘사람마음’의 홈페이지 / ‘사람마음’ 캡처

아동기에 학대를 겪은 이들이 상담을 통해 트라우마를 이겨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공적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에는 이런 기반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 생존자를 위해 의료비 지원 같은 게 있더라도 신고 기록이 있어야 해요. 지금 20~30대의 성인이 아동이었을 때 누가 엄마·아빠를 신고했겠어요. 기본적으로 아동학대라는 게 범죄라고 인식된 것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신고한다고 한들 경찰에서 제대로 대처하는 것도 아니었고.”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마음이 택한 길은 ‘시민모금’이다. 아동기 학대를 겪은 성인 생존자 지원을 위한 펀딩을 8월부터 진행할 예정이다. 초기 4회의 상담비를 전액 지원해 회복에 대한 동기를 강화하고 상담에 안착하는 과정을 지원한다. 국가폭력, 성폭력, 성매매, 사회재난과 산재피해자, 자살유가족, 난민, 성소수자 등 다양한 트라우마 생존자의 회복에 힘을 기울여온 치유기관이자 인권센터로서 사람마음을 지탱해온 것은 활동가들의 헌신과 시민의 후원이었다.

이한별씨는 아동학대의 잔혹성보다 피해자의 삶과 생존자의 회복에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요청했다. 분노는 시간이 지나면 식지만,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오랜 시간 이어진다. 사람마음은 아동학대를 겪은 이들의 고통이 우리가 함께 책임져야 할 고통임을 강조한다.

“아동학대 트라우마는 사적인 고통이 아니에요. 나라가 돌봄의 모든 책임을 가정에 전가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을 보호할 충분한 사회적 체계가 마련돼 있다면, 사회가 아동학대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준다면 막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개인의 나약함 때문에 학대 후유증을 경험하는 것은 더욱 아니고요. 아동학대 후유증을 사회적 고통으로 인식하고, 현재의 학대 피해 대책뿐만 아니라 과거 학대에 따른 트라우마 후유증을 완화하는 대책이 마련돼야 해요. 혹시 자신이 그런 트라우마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면 사람마음이 회복의 길에 동행할 수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박희정 기록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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