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침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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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을 뺏는 외계인들의 침공

외계인 침공은 19세기 말 이래 수없이 반복돼 온 이야기 소재다. 이제 이런 전개를 하려면 차별화가 필요하다. 난공불락의 거대 외계선단이 몰려와 대도시를 쑥밭으로 만드는 B급영화 서사는 뻔한 액션물에 SF라는 화장분만 발라준 꼴이다. 그나마 소설은 영화처럼 시청각 효과로 혼을 뺄 재간이 없으니 파격적인 발상의 전환 없이는 깊은 인상을 주기 어렵다.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장편 <산책하는 침략자>는 이런 시도가 성공한 예다.

<산책하는 침략자>(마에카와 도모히로 지음) / 알마

<산책하는 침략자>(마에카와 도모히로 지음) / 알마

과학소설 역사상 이 소설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침공전략’ 범주에 속한다. 유명한 예로 에릭 프랭크 러셀의 <보이지 않는 생물 바이튼>(원제 <불길한 장벽>. 국내에는 청소년판으로 출판됐다)과 콜린 윌슨의 <정신기생체>가 있다. 전자의 외계 기생생물 바이튼은 가시광선대역에서는 투명해져 인간 눈에 잘 띄지 않으며 후자의 차토구아인은 아예 육체가 없다. <산책하는 침략자>의 외계인들은 일본만화 <기생수>처럼 인간 뇌에 침투해 숙주의 몸과 의식을 지배한다(단 이들의 원래 생김새는 언급되지 않는다).

외계인 모습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속성보다 더 중요한 세 작품의 공통점은 침입자들이 인간의 감정과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데 있다. 바이튼과 차토구아인은 인간의 공포와 분노 같은 감정을 부추겨 그것을 양식으로 삼는다. ‘산책하는 외계인’은 이보다 한수 위다. 이들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특정 개념을 추출해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덕분에 전혀 이해할 수 없던 인간사회의 작동방식을 대번에 깨닫는다.

지구에 파견된 외계인 척후병 몇몇이 광범위한 정보수집에 나서자 그 부작용으로 소위 ‘개념 없는’ 인간들이 생겨난다. 외계인이 어떤 개념을 가져가면 그걸 빼앗긴 인간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그 개념이 존재하지 않게 되니까. 그래서 과일가게 주인은 바나나와 사과는 구분해도 정작 과일이란 총체적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족과 혈연 개념을 빼앗긴 여성은 아버지를 치한으로, 언니를 방해꾼으로 오인한다. 마침내 외계인들이 암약하는 마을에 정신이상자가 늘어난다.

남편 신지의 외도로 괴로워하던 여주인공 나루미는 외계인이 빙의된 남편과 새로운 관계를 일구며 당혹감과 기대감을 함께 맛본다. 남편이 하루가 멀다고 동네사람들 머릿속을 구멍투성이로 만들어놓고 다녀도 둘만의 세상은 마치 연애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외계인은 나루미를 아내라서가 아니라 현지적응 가이드로 인식해 개념 추출대상에서 배제한다).

외계인이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려 할 즈음 이야기는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다. 나루미는 지금 자기 머릿속에 가득한 개념을 제발 가져가라고 외계인에게 간원한다. 외계인이 떠나면 신지는 육체의 빈 껍질만 남을 테고 그는 이별의 고통을 견딜 기력이 없다. 현지가이드에게 개념을 빼앗을 마음은 없었으나 하도 부탁하니 마지못해 그 개념을 가져온 외계인은 불에 덴 듯 놀란다. 나루미가 신지를 얼마나 아꼈는지 낱낱이 절감한 그는 경찰의 추격을 더 이상 피하지 않겠다며 동석한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도망 안 가요. 나 할 말 있어요.” 이런 외계인들이 있다면 우리에게 해가 될 뿐인 개념을 몽땅 가져가달라 부탁하고 싶다, 인종편견, 종교다툼, 전쟁, 폭력, 권력욕 같은 것들을.

<고장원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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