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들은 군홧발로 학교 기숙사를 짓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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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는 팔레스타인 민간인 공격을 ‘방어권’으로 옹호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은 ‘테러’로 규정한다.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인 가자지구에서 지난 5월 23일(현지시간) 주민들이 폐허로 변한 주택가에 임시로 천막을 치고 생활하고 있다. / 가자|로이터연합뉴스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인 가자지구에서 지난 5월 23일(현지시간) 주민들이 폐허로 변한 주택가에 임시로 천막을 치고 생활하고 있다. / 가자|로이터연합뉴스

키리야(25)는 1996년 이스라엘이 불법 점령한 팔레스타인 나블루스에서 태어났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60㎞ 떨어진 나블루스는 터키식 목욕탕과 야곱의 우물 교회, 대모스크, 시장이 있는 아름다운 도시다. 키리야는 그곳을 “내가 사랑하는 많은 사람과 멋진 어린 시절의 기억이 가득 찬 세계”로 기억한다.

이 아름다운 도시는 게토(ghetto·유대인이 사는 지역)화됐다. 이스라엘은 나블루스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에 8m 높이의 분리 장벽을 세웠다. 곳곳에 이스라엘 검문소가 팔레스타인인들의 이동을 가로막는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벽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에 빗대 ‘아파르트헤이트 장벽’이라고 부른다.

키리야는 6월 16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팔레스타인인이라면 누구나 이스라엘군의 감시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공립 알-쿠즈대학에 다녔던 2013년부터 2017년까지의 공포를 기억한다. 장벽 근처의 교정에 무장 군인들이 보초를 섰다. 이스라엘군은 가끔 이유 없이 캠퍼스에 들어와 대학생들에게 고무탄과 최루탄을 쐈다. 그럴 때마다 학교는 아수라장이 됐다. 대학생들에게 방독면이 생필품이 된 곳, 그가 기억하는 대학이다.

불심검문은 일상이다. 어느 날 한밤중에 기숙사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파자마 차림의 학생들을 내보내고 방을 수색했다. 키리야는 “새벽 3시에 추위에 떨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군인들이 군홧발로 밟고 들어온 방은 온갖 헤집어진 물건으로 난장판이 돼 있었다. 군인들이 떠난 뒤에도 기분이 처참했다.

키리야는 두 살부터 열세 살까지 미국에서 살았다. 열두 살 때 미국 학교에서 겪은 나라 잃은 설움을 기억한다. 키리야는 학교 수업시간에 ‘나는 팔레스타인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역사 선생님은 “지도에 팔레스타인이라는 나라는 없는데, 어디 있는지 짚어볼 수 있니?”라고 물었다. 키리야는 지도에서 팔레스타인을 찾을 수 없어 당황했다. 선생님은 “아마 넌 파키스탄에서 왔겠지”라고 했다. 키리야는 집에 가서 부모에게 “정말 우린 파키스탄에서 왔냐”고 물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그때의 상처가 아직 마음에 남았다.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

아람(25)은 팔레스타인인 아버지를 둔 디아스포라 2세대다. 조부모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으로 대대로 살아온 팔레스타인 땅에서 쫓겨났을 때 아버지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아람의 부모는 요르단의 난민촌에 살다가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로 넘어와 1996년 아람을 낳았다. 아람의 국적은 요르단이다. UAE는 자국에서 태어난 아람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았다. 정작 아람은 요르단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군인들은 군홧발로 학교 기숙사를 짓밟았다

아람은 팔레스타인에도 가본 적이 없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망명자의 입국을 금한다. 그런데도 아람은 자신이 팔레스타인인이라고 느낀다. 이유를 물으니 아람이 되레 되물었다. “나는 UAE에선 외국인이고, 요르단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 거기서도 외국인으로 여겨질 것이고, 그렇다고 내 고국 팔레스타인에 발을 들일 수 없다는 사실이 이상해요. 나는 어디로 가면 되죠?”

림 자이툰(25)은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 3세대다. 조부모가 1944년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에서 아버지를 낳았다. 이집트 국적의 아버지에게도 팔레스타인은 낯선 곳이다. 자이툰도 1996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병원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팔레스타인 병원’이었다. 여덟 살까지 카이로에서 살다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자이툰은 미국 국적을 갖고 있다.

자이툰은 자라면서 어렴풋이 팔레스타인 뿌리를 깨닫게 됐다. 청소년기에 할아버지가 가끔 이스라엘 정부를 욕하는 모습을 봤다. 할아버지는 1944년 예루살렘에 있던 집을 이스라엘에 빼앗기고 쫓겨났다. 언젠가 되찾을 수 있을까, 실낱같은 희망으로 할아버지가 보물처럼 보관해온 예루살렘 집 설계도를 자이툰은 본 적이 있다.

자이툰이라는 성씨는 아랍어로 올리브나무를 뜻한다. 평화의 상징이기도 한 올리브나무에는 팔레스타인의 눈물이 서려 있다. 이스라엘은 정착촌 건설을 위해 팔레스타인인들이 심은 올리브나무를 뽑기 시작했다. 제3차 중동전쟁 후인 1967년부터 지금까지 뽑힌 올리브나무만 200만그루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팔레스타인 공립 알-쿠즈대학 근처의 이스라엘 장벽 / 위키미디어

팔레스타인 공립 알-쿠즈대학 근처의 이스라엘 장벽 / 위키미디어

“전쟁이 아니라 인종청소”

키리야, 아람, 자이툰은 지금 모두 한국에서 살고 있다. 키리야와 아람은 대학원에 다니고, 자이툰은 한국에서 영어교사로 일한다. 세 사람은 지난 5월 10일 이스라엘 전투기가 팔레스타인 무장정치조직 하마스가 지배하는 가자지구를 폭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졸였다.

“그건 전쟁이 아니라 한쪽의 일방적인 인종청소였어요.”

전쟁이 일어났을 때의 심경을 묻자 키리야는 이렇게 답했다. 미디어는 팔레스타인인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민간인 공격을 ‘방어권’으로 옹호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은 ‘테러’로 규정한다.

아람은 동예루살렘에 사는 친구들이 무사한지 확인하기까지 며칠이나 기다려야 했다. 아람은 “여성과 아이들의 시신이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조각조각 나오는 모습을 보는 고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폭격으로 어린이 66명을 포함해 팔레스타인인 최소 256명이 숨지고, 1900명 넘게 다쳤다.

지난 5월 21일 휴전은 했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인종차별을 끝내지도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이스라엘 군경은 항의 시위에 참석한 팔레스타인인들을 ‘뒤끝 체포’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다시 최루탄을 뒤집어쓰는 삶으로 돌아갔다.

무엇보다 이번 갈등의 씨앗인 셰이크 자라 철거 문제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에서 2㎞ 떨어진 셰이크 자라에서 대대로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의 집을 철거하고 이스라엘 정착촌을 건설하려 한다.

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시를 읊는 키리야의 마음은 울고 있다. “전쟁은 끝날 것이다./ 지도자들은 악수할 것이다./ 하지만 노파는 순교한 아들을 계속 기다릴 것이다./ 아내는 사랑하는 남편을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영웅이던 아버지를 기다릴 것이다./ 누가 우리 조국을 팔았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난 누가 대가를 치렀는지는 봤어.”

<김윤나영 국제부 기자 nayo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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