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진보를 상상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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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노동자를 위한 정당과 노동자 정당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의 권리를 생각하는 정당과 여성의 정당은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소수자 정당이 되지 않으면서도, 소수자를 위하는 정당을 만들 수 있고, 만들어내야만 합니다. 우선 우리 모두는 시민이기 때문입니다.”(에드워드 케네디의 1985년 연설 중에서)

정의당 중앙당사 / 국회사진기자단

정의당 중앙당사 / 국회사진기자단

복음주의 진보정치의 배타성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덕분에 한국사회가 정치·경제적으로 더욱 진보했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민주화의 성과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노동운동의 성과는 무상급식과 주 52시간 근무와 같은 제도를 통해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민주화 시대를 이끈 주역들은 또 다른 경제적 기득권이 돼 부동산으로 상징되는 경제적 양극화를 이끌었고, 조국 사태를 기점으로 촉발된 세대갈등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를 당선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노동자의 권익이라는 신성한 목적으로 정당화됐던 양대 노총의 계급정치는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이항대립 구도를 통해 자본가를 적으로 설정함으로써 노동자 계급 내부의 다양성을 획일화하는 오류에 빠졌다. 이런 계급투쟁 속에서 노동운동은 채 10%가 되지 않는 조직 노동계급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타락했다.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동력이 사라진 곳에서 여성, 성소수자, 소수인종 등 소수자의 평등한 권익을 위해 싸우는 정체성 정치가 진보운동의 주요 의제로 자리 잡았다. 정체성 정치는 ‘관용’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개념에 호소하며, 소외된 자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기획에 동등하게 참여하도록 승인해달라는 정치적 실천이다. 장애인, 성소수자, 청년, 여성 등의 정체성에 천착하는 정의당의 진보정치는 노동운동의 한계가 폭로된 2000년대 이후 한국 진보세력이 고민했던 흔적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는 주변부가 된 집단이 정체성을 통해 사회 주류세력과의 차이를 드러내면 낼수록 주변부의 경험, 기억, 역사를 특권화하고 이를 정당화하면서 특유의 배타성을 만들어낼 위험에 노출돼 있다.

정치학자 마크 릴라는 저서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에서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이 “넌 여자가 아니니 나를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상황과 레즈비언이 “넌 여자이긴 하지만 레즈비언은 아니니 나를 이해하는 척하지 마”라고 이야기하는 상황을 기술한다. 이를 통해 그가 도달한 결론은 정체성 정치가 결국 사회의 통합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균열을 만들어내는 파국에의 경고였다. 그런 의미에서 주디스 버틀러는 지나친 정체성의 강조가 인종주의와 가부장제를 다시 불러들일 수 있다고 경고했고, 아마르티아 센도 정체성 정치가 부정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세계시민주의라는 긍정적 차원으로 진화해야 함을 역설했다.

정의당으로 상징되는 한국 진보진영의 정체성 정치는 여전히 부정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 정체성 정치가 긍정적 실천으로 선회하려면 정체성에 대한 강조가 사회에 화합의 신호를 보내는 촉매가 돼야 한다. 그런 실천이 가능하려면 정체성 정치의 활동가들은 ‘자기 자신과 유사하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설득하는’ 평범한 민주정치의 실천주체여야 한다. “정치란 설득이지, 자기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진보세력은 정체성 정치를 왜곡하고 곧잘 도덕주의의 함정에 빠진다. 소외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수의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낙인찍고, 이들을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설교의 대상으로 타락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소수자 운동에 절박함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적당히 정의롭게 살아가려는 현실의 생활인 대다수를 한국의 진보정치는 도덕적 훈계의 대상으로 모함한다. 인류 모두가 죄인이니 회계하라고 외치는 복음주의 개신교 목사와 그들은 결이 같다.

국민이라는 단어의 회복

정의당의 정치는 도덕교사의 지루한 윤리 강의다. 민주당의 정치는 촌지를 받아 챙기는 도덕교사다. 촛불을 들고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탄핵을 이끌었던 무당층은 이 두 세력 가운데 그 누구에게도 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 새로운 정치와 정치세력을 보고 싶은 이들의 열망이 이준석 돌풍으로 나타난 것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이들에겐 낡은 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꿰뚫어보는 통찰의 능력이 있다. 그들이 보기엔 이준석이 당대표가 되는 국민의힘이 민주당이나 정의당보다 더 새로워 보이는 것이다.

정치가 종교화되는 지점에서 모든 광기가 시작된다. 한국사회는 정치인을 지나치게 신격화하는 여러 운동을 통해 정치가 얼마나 쉽게 종교화될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 모든 거대종교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언제나 내부갈등을 통해 다양한 분파가 생겨나고, 또한 이들 분파 간의 갈등이 이단시비를 통해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전쟁 양상으로 비화된다는 참극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진보진영의 정체성 정치는 복음주의 종교와 만난다. 내가 속한 분파의 교리만이 옳다는 독단, 그리고 그 분파에 속하지 않은 모든 이들을 이단으로 악마화하는 편협함이 거대종교 타락의 원인이라면, 정의당의 정체성 정치 또한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정의당의 정체성 정치는 보수 개신교의 복음주의와 목표가 같다. 그 둘의 끝엔 오직 배타성이라는 이념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현재의 정의당은 영원히 집권할 수 없다.

마크 릴라가 그의 책에서 내놓은 대안은 시민이라는 개념의 회복이었다. 한국에서도 언젠가 시민이라는 개념이 진보진영의 어젠다가 됐던 적이 있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에서 시민이 사용되는 맥락은 상이하다. 미국에서는 그저 피플(People)에 불과한 단어가 한국에선 인민, 민중 등이 북한과 연관된다는 이유로 어휘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한국 진보정치가 꾸준히 지켜내온 통합의 단어는 ‘국민’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정식 명칭은 국민의 정부였으며, 노무현 정부의 첫 표어는 ‘국민이 대통령입니다’였고, 탄핵 촛불의 구호 또한 ‘우리가 국민이다’였다. 하지만 한국의 세련된 진보세력은 국민이라는 단어가 촌스럽다는 이유로, 국가권력이라는 억압적인 개념을 내포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정치에서 국민이라는 단어를 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민이라는 단어는 보수세력이 전유했고, 바로 그곳에서 이준석이라는 새로운 정치신인이 탄생했다. 이준석의 돌풍이 국민의 새로움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지금, 한국사회를 단 한걸음이라도 진보시키려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는 다시 국민을 소환해야만 한다. 그것이 진보정치가 소수의 정체성 정치를 벗어나 한국사회를 거대하게 변화시키는 현실정치로 입문하는 지름길이다.

김우재는 한때 초파리로, 지금은 꿀벌로 세계정복을 꿈꾸는 과학자다. 동물의 행동을 신경회로의 관점에서 연구하며, 사회성 행동을 유전학적으로 이해하고 싶어한다. 연구 외에도 과학의 사회적 사용에 관심이 많으며 <플라이룸> 등의 책을 저술했다. 현재 하얼빈공대 생명과학연구센터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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