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예술의 세계

(2)디지털의 미로에서 마주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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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歲寒 평안平安’전, 대규모 미디어아트전시로 눈길

디지털로 만들어진 영상들은 태어날 당시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감정 중 즐거움의 하부구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이들을 선택하고 삭제할 수 있었고, 무시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수십년간 쾌락의 형태로 우리 곁에 있던 존재들을 문득 박물관에서 마주쳤을 때 처음 드는 감정은 그저 당혹감과 거부감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미디어아트전시인 ‘평안전’의 입구로 한 관람객이 들어가고 있다. / 이미지베이커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미디어아트전시인 ‘평안전’의 입구로 한 관람객이 들어가고 있다. / 이미지베이커리

반면 예술은 늘 숭배의 대상이었다. 시대에 따라 미의 기준은 다를지라도 위대함과 경외감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는 것이 당연한 존재들이었다. 쾌락을 위해 존재하던 색색의 케이블과 차가운 스크린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그리스의 신들을 경배하면서 생겨난 박물관, 미술관, 예술이라는 신전에 발을 들여놓고 자신들을 경배하라고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전히 박물관에서 경배할 것을 찾아 헤매는 지극히 일반적인 대중에게 과연 그것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기는 한가? 디지털 아트와 마주치면 일단 종종걸음으로 황급히 벗어나는 우리. 이런 경직된 우리에게 난해함과 상징성으로 뒤덮인 작품이 아닌 좀더 친절한 디지털 아트는 없었을까? 그러다 지난겨울 국립중앙박물관의 미디어전시에서 막연한 두려움 대신 안도감을 발견했다.

지난 4월 막을 내린 ‘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歲寒 평안平安’전은 최초의 대규모 국립중앙박물관 미디어아트전시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이 기획은 한겨울 추위인 세한을 함께 견디면 곧 따뜻한 봄날 같은 평안을 되찾게 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다고 한다.

제주의 겨울바람 속으로 들어가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와 단원 김홍도의 ‘평안감사향연도’를 모티프로 만들어진 미디어아트는 미디어예술의 무한한 확장성을 보여줬다. 이제 디지털기술은 개별기관이나 작가뿐 아니라 미술관·박물관의 대규모 전시에까지 이미 깊숙이 들어온 도구가 됐음을 보여준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갔던 나이는 55세, 그가 쓴 글씨 중 획 하나를 떼어 몽둥이로 써도 될 정도로 힘의 서체를 구사했던 추사의 나이는 40대였다.

‘세한도’/ 국립중앙박물관

‘세한도’/ 국립중앙박물관

40대와 달라진, 그리고 좀더 정제된 추사의 50대를 ‘세한도’에서 보게 된다. 입구에서 우리는 제주의 겨울바람 속으로 들어간다. 영상 속 제주는 겨울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람을 쓰러뜨리진 않아도 삶의 의지를 휘어지게 만들고도 남을 황량한 겨울바람. 추사의 서체는 제주의 모진 바람 속을 뚫고 만들어져 누그러질망정 꺾이지 않는 방법을 찾아낸 것처럼 보였다. ‘세한도’를 보기 전 ‘세한도’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세한도’가 펼쳐 보이는 영상에서 감동은 시작된다. 설명이 끝나고 두루마리가 접히고 묶이는 그 경이로운 과정은 몇분에 불과하지만 마치 붓을 움직이는 추사의 등 뒤에서 지켜보는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한다. 그리고 실제 ‘세한도’를 들여다보면 앞서 영상에서 보여줬던 설명을 확인하게 된다. ‘세한도’를 보며 지나가는 게 아니라 자세히 알게 되고 추사의 고통이 어떠했는지 공감하게 된다. 추사의 40대와 50대의 다름이 여기서 이해가 되고 홀로 멀리 떨어진 제주의 겨울을 버텨야 했던 그의 고통을 위로하고 싶어진다.

‘평안감사향연도’/ 국립중앙박물관

‘평안감사향연도’/ 국립중앙박물관

디지털로 복원된 ‘평안감사향연도’

제주도의 매서운 겨울바람을 뒤에 두고 모퉁이를 돌면 대동강의 봄이 펼쳐진다. 평안감사의 부임 잔치를 기록한 ‘평안감사향연도’.

박물관은 평양의 거리를 구현해놓고 감사가 부임한 그날, 그 떠들썩하고 흥겨운 봄날로 우리를 초대한다. 감사와 눈인사 한 번이라도 하려는 평양의 유지들, 흥을 돋우는 기생들, 화려한 춤사위, 관아 구석구석 바쁜 일꾼들, 잔치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공식적인 그림이 일반적으로 전시됐다면 ‘이렇게 잔치를 했겠구나’ 하는 정도의 감탄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옛 그림이 미디어로 재현되는 순간 연광정에서, 부벽루에서, 관아의 어느 구석에서 연신 잔치를 훔쳐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해가 지고 어두워진 대동강의 물결 위로 유유자적 흐르는 감사의 배를 뒤따르며 대동강 강변을 수놓는 불꽃들의 화려함은 장관을 이룬다. 강을 따라 내려오는 화려한 대동강 야연의 행차 구경꾼들 속에 내가 있다. 어쩌면 강물에 어른거리는 횃불, 감사의 부임을 축하하는 횃불 하나는 내가 들고 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디지털로 복원된 ‘평안감사향연도’는 술에 얼큰하게 오른 일꾼들, 감사의 부임으로 웅성거리는 저잣거리는 그냥 지나갈 수 없는 흥겨움으로 관람객의 발걸음을 들썩이게 하고 엿가락 하나쯤 주머니에 슬쩍 넣어둔 게 아닐까 주머니를 뒤적거려 보기도 한다. 관아의 질펀한 연회장을 훔쳐보면 감사에게 얼굴도장을 찍느라 기다리는 초조한 지역의 유지들, 아전들의 얼굴이며, 그리고 인사치레를 받는 꼬장꼬장한 감사의 표정까지 자세히 보게 되면, 옛 그림 속 그때나 지금이나 상사가 주연이 되는 회식이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던 듯하다.

하지만 현재의 무용수들로 재연한 기생들의 춤사위 영상이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 위로 펼쳐지면 그네들과 달리 잔치에 참여한 우리는 그저 신이 날 뿐이고, 당시 평안감사에게 올리는 환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빠짐없이 보고 느끼게 된다. 복원된 영상의 춤사위는 우리에게 팔과 손을 휘저으면서 평안감사의 잔치 속에서 같이 춤을 추자고 초대한다. 어느새 우리는, 나는 잔치의 한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말처럼 지식의 진보가 인간을 세상의 중심에서 창조의 주변으로 내동댕이친 지 오래이긴 하다. 그럼에도 ‘세한도’와 ‘평안감사향연도’에서 구현된 디지털은 창조의 주변으로 내동댕이쳐진 우리를 창조의 테두리 안 어딘가로 다시 끌어당겨 주는 친절한 손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시대와 예술의 다리와 문을 지키는 문지기의 친절한 손일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인식하면 디지털 아트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허지영 아테니빌 아트디렉터 장인선 아트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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