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미국 투자 ‘장고 끝에 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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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정상회담에 맞춰 발표… 인센티브 받을지는 미지수

애플이 지난해부터 컴퓨터, 노트북, 태블릿 신제품에 인텔의 중앙처리장치(CPU) 대신 자신이 직접 설계한 ‘M1칩’을 넣고 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전작보다 얇고, 빠르고 에너지 효율이 높은 신제품에 고객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공동기자회견에서 한국 기업인들에게 미국 내 투자에 대한 감사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 / 워싱펀/강윤중 기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공동기자회견에서 한국 기업인들에게 미국 내 투자에 대한 감사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 / 워싱펀/강윤중 기자

애플 M1칩의 성공은 앞으로 시스템 반도체에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의 비중이 높아질 것임을 의미한다. 인공지능(AI), 자율주행, 메타버스가 일상화된 시대엔 제품의 두뇌와 눈 역할을 하는 시스템 반도체가 고도의 집적을 필요로 할 것이고, M1칩의 애플처럼 설계는 자신이 하고 생산은 TSMC 같은 전문업체에 위탁하는 일이 많아질 것이다.

그런데 이런 최첨단 시스템 반도체 생산을 주문할 만한 회사들은 어디에 있을까? 대부분 미국이다. 애플, 테슬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등이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때부터 ‘리쇼어링(제조업의 본국 귀환)’ 등 자국 내 생산시설 확충에 힘을 쓰고 있다. 미국에서 팔 물건은 미국에서 만들라는 것이다. 파운드리 업체들도 미국에서 수주를 따내기 위해선 미국 공장이 필요해지고 있다. 업계 1위인 TSMC는 지난해 5월 애리조나주에 120억달러(약 13조원)를 들여 파운드리 공장을 짓기로 했다. 업계 2위인 삼성전자도 올해 초부터 텍사스주 오스틴에 170억달러(약 19조원)를 투자해 파운드리 공장을 증설하는 안으로 지방정부와 협상을 벌였다.

삼성전자가 고심을 거듭한 이유

삼성전자의 미국 투자 결정은 TSMC만큼 화끈하지 못했다. 올 초만 해도 미국 투자를 추진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한국으로 ‘리턴’하는 선택지를 함께 놓고 고민했다. 태평양 건너 미국에 기업의 사활이 걸린 최첨단 라인을 짓는 데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이는 반도체산업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기술집약적이고 기술 보안이 중요하다 보니 연구 시설과 생산시설이 붙어 있어야 유리하고, 정보기관의 기술 보호도 받아야 한다. 엄청난 전기와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를 안정적으로 확보해줄 정부(지방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 로열티 높은 고급 인재도 뽑을 수 있어야 한다. 삼성전자 공장이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 용인 기흥, 화성, 평택에 몰려 있는 이유다. 대만의 경우 고속철도 라인 주변으로 공장들이 배치돼 있다. 국내 집적의 이점을 포기하고 미국에 공장을 지으려면 그만큼의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지난 2월 미국 남부에 불어닥친 한파로 삼성전자 오스틴 공장에 전기가 끊기는 일이 있었다. 24시간 가동돼야 하는 반도체 공장엔 엄청난 피해였고, 한달 가까이 공장이 멈추면서 삼성전자는 3000억원대의 피해를 입었다. 반면 TSMC 대만 공장은 올봄 대만의 극심한 가뭄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지원 하에 최우선으로 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이미 평택에 넓은 공장 부지를 확보하고 있는 삼성전자 입장에선 평택에 지었을 때 일어나지 않을 정전 같은 피해가 오스틴에선 되풀이되지 않을까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삼성전자 오스틴 파운드리 공장 전경 /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 오스틴 파운드리 공장 전경 /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에선 아직 TSMC에 한참 뒤진 2위라는 점도 고심을 깊게 했다. TSMC는 파운드리 업계에서 점유율 58%로 압도적인 1위다. 기술에서도 삼성전자에 한수 앞선다. 애플, 테슬라 등 다수의 미국 기업이 이미 파트너로 확정돼 있다. 수주 걱정 없이 미국에 공장을 짓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삼성전자는 점유율 18%인데, 절반은 삼성전자 내부 위탁 물량이다. 스마트폰, 가전,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함께하는 종합 전자업체라서 애플 같은 회사들이 경쟁사라는 인식 때문에 반도체 위탁을 꺼린다. 더구나 TSMC는 애리조나주에 공장 5개를 더 짓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외신 보도가 나오고, 홈그라운드 이점이 있는 인텔도 지난 3월 200억달러(약 22조원)를 투자해 파운드리 사업에 진출하겠다고 했다. 삼성전자는 이 공장들이 지어진 몇년 후에 ‘과잉 투자’가 되지 않을지, 물량을 수주받을 수 있을지 꼼꼼히 따져야 하는 입장이다.

모든 변수를 압도한 미국 정부의 압박

삼성전자의 이러한 고심을 단번에 압도한 외생변수는 조 바이든 정부의 압박과 때맞춰 열린 한미정상회담이었다. 바이든 정부는 올 초부터 자동차 생산 중단을 불러온 반도체 품귀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반도체 공급망 강화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4월 반도체 품귀 관련 기업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반도체 웨이퍼를 흔들며 투자를 촉구했다. 여기에 한국 기업으론 유일하게 삼성전자가 초대됐다. 미 상무부 주최로 지난 5월 20일 열린 반도체 화상회의에도 불려갔다. 반도체 투자에 대한 대규모 보조금이 당근으로 제시됐다. TSMC와 인텔이 이미 파운드리 투자를 발표한 터라 삼성전자가 받는 압박은 더욱 컸다.

더구나 한국 정부는 백신과 대북 관계에서 미국의 협조가 필요했다. 대기업의 투자로 성의를 보여야 했다. 현대차·SK·LG그룹은 전기차와 전기차 배터리로 미국 시장을 공략할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한미 정부 모두 화룡점정을 찍을 삼성전자의 투자 결정을 원했다.

결국 삼성전자는 미국 지방정부와의 투자 협상을 마치지 않은 채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길에 동반한 김기남 대표이사(부회장) 입으로 ‘미국 170억달러 투자’를 발표했다. 삼성전자의 결정으로 ‘미국 44조원 투자’의 가장 큰 퍼즐이 맞춰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김기남 부회장 등을 일으켜 세워 “고맙다(Thank you)”라고 인사하며 박수를 쳤다.

이제 삼성전자의 미국 투자는 결정됐다. 업계에선 여러 고려 사항이 있겠지만 어차피 미국에 투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분석이 많다. 다만 구체적인 협상 없이 투자부터 발표한 삼성전자가 미국 정부에서 큰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잡힌 물고기’에게 미끼를 주겠냐는 것이다. 그래도 삼성전자가 구체적인 투자 지역을 정하지 않고, 텍사스주 오스틴과 애리조나주 피닉스, 뉴욕주 제네시카운티 등 여러 후보지를 고려하고 있다고 한 것은 지방정부와의 협상에서 세금 혜택 등 더 많은 인센티브를 따내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조미덥 산업부 기자 zor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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