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 법조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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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공평한 정의로움을 기대하며

서울 서초동에 법조타운이 있다. 법원과 검찰청, 등기소를 중심으로 변호사만 4000명 가까이 둥지를 틀고 있다. 그밖에 법무사, 행정사, 속기사, 공인회계사, 변리사 등 법과 관련된 이들이 골목골목을 지킨다. 서울 지하철 2호선과 4호선 교대역 개찰구를 나서자마자 교통사고, 이혼, 파산면책, 민사 형사 등 갖가지 전문 분야를 내세운 변호사들의 광고판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법은 또 다른 상품이다.

건물마다 변호사사무실과 법무법인들이 자리 잡고 있다.

건물마다 변호사사무실과 법무법인들이 자리 잡고 있다.

반포대로를 중심으로 북쪽은 검찰청과 법원이 자리 잡고 있어 그 앞 골목들은 간간이 식당과 문구점이 보이고 대부분 변호사사무실과 법무법인이 차지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등기국 앞 한때 세상 이목을 끌던 청계재단과 영포빌딩이 있다. 서울지방변호사회를 비롯한 각종 단체도 이곳에 자리 잡았다. 골목은 한가한 행인은 볼 수 없어 한적했지만, 서류봉투를 들거나 가방을 둘러맨 이들이 부지런히 길을 오간다. 한눈에도 법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 또는 법의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대개는 검은색 혹은 짙은 청색의 양복 차림인 것이 눈에 띈다.

골목을 남쪽으로 내려다보며 비탈의 정점에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 있다. 길과는 축대로 구분돼 정문 외에 골목에서 접근할 방도가 없는 것이 위압적인 모양새와 함께 권력을 과시하는 분위기를 감추지 못했다. 권위의 성채 앞에 서면 주눅이 들고, 그 안에 들어설 일이 평생 생기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검찰청의 외관은 유독 세상을 굽어보며 다가서지 말라 외치는 것 같다. 골목이 검찰청과 이어지지 못한 탓에 검찰청 앞 골목은 유난히 한적했다. 역시 건물마다 변호사사무실과 법무법인이 들어차 있다.

법원과 검찰청은 골목과 주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법원과 검찰청은 골목과 주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서초동 꽃동네에서 법조타운으로

지금이야 멀쩡하게 번듯한 건물들이 이 구역을 채우고 있지만, 1980년대 후반까지 서초동 일대는 비닐하우스촌이 주인이었다. 대법원과 검찰청 사이 사거리에 우뚝 선 향나무를 두고 동서남북 대로변은 화초를 기르고 파는 온실이 들어서 있었다. 그때 이 지역의 이름은 서초동 꽃동네. 지금의 법조타운이란 명칭과는 거리가 멀다.

검찰청과 법원 앞 넓은 지역은 도시 빈민들의 주거용 비닐하우스가 가득 차 있었다. 아파트 딱지를 준다는 풍문으로 투기꾼들은 비닐하우스마저 사들여 칸을 나눠 사고팔았다. 방안에는 사람 사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헌 옷을 걸어두고 문을 열면 주인 없는 신발만 집을 지키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확인 못 할 소문으로 이 일대가 영동 빨간 바지라는 별명의 투기꾼 것이라는 말도 떠돌았다. 가끔 방화인지 실화인지 불이 나 단지가 정리되는 일도 있었다. 1990년대 초 일대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정비가 된 후 어디서도 가난한 이들의 모습과 철마다 다른 꽃을 보여주던 도시화원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돈이 주인인 이 도시에 그들은 어울리지 않는다.

오래된 연립들이 골목을 지키고 있다.

오래된 연립들이 골목을 지키고 있다.

법원과 검찰청 사이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 동서쪽에 같은 이름의 건물 4채가 서 있다. 정곡빌딩. 일대의 땅이 해주 정씨 문중의 것이었고, 개발되면서 이리저리 팔고 남은 땅에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그나마 일부는 팔려나갔고, 임대 수익금은 장학기금으로 쓴다고 한다. 그 옛 흔적으로 정곡빌딩 옆에는 이방원과 사돈을 맺었던 정역의 비석이 남아 있다. 그 후손이 살았던 집성촌이라 하여 ‘정곡(鄭谷)’이란 돌비석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이야 그 사연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어쨌든 이곳은 정씨들이 살던 곳이다.

서울중앙고등법원과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있는 동쪽 구역은 상대적으로 유연한 분위기다. 민원인들이 오가며 서류를 챙기는 문구점도 보이고, 식당들도 좀더 문턱 낮은 모습이다. 무작정 법률사무소란 이름보다 이혼, 등기, 소송, 증여, 개인회생, 경매, 파산면책 등의 구체적인 종목들을 줄줄이 걸어둔 곳이 많았다. 대한법률구조공단의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 앞에는 두꺼운 서류를 꼼꼼히 살피는 이도 눈에 띈다.

문구점 주인은 “안타까운 사연도 많다. 자기 이름조차 쓸 줄 모르는 이들이 송사에 걸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볼 때면 법은 둘째치고 인정이 뭔지부터 생각하게 된다” 했다. 법의 여신은 눈을 감은 채 저울을 들고 서 있다. 개개인의 안쓰러운 사정이야 법의 잣대로 잴 수 없고, 그러다 보니 법 앞에서 더 억울하다고 눈물짓는 이들도 나오게 마련이다. 골목을 벗어나자 큰길가에 법과 판결의 잘못을 주장하는 현수막을 볼 수 있었다. 법은 개인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법원 주변에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도 많다.

법원 주변에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도 많다.

해주 정씨 집성촌 알려주는 옛 흔적

서초대로 남쪽 편은 식당과 술집과 법률사무소가 적당히 뒤엉켜 있다. 법조타운이 들어서기 전까지 대부분 작은 연립주택이 있었으나 지금 남은 것은 몇채 되지 않는다. 골목 곳곳에 변호사사무실이 있고, 뒷골목까지 식당과 주점이 들어차 있다. 오래된 건물을 헐고 다시 짓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적어도 이 구역에 불경기라는 푸념은 어울리지 않는다.

식당들은 비교적 고급 메뉴를 갖추고 있는데, 가격대는 그에 비해 높지 않아 보인다. 점심시간이 되자 법원과 검찰청은 물론이고, 인근 사무실 직원까지 골목으로 밀려들었다. 맛집이라 소문난 듯 10명 이상 기다리고 선 식당도 제법 눈에 띈다. 참치집이며 삼계탕집에 대낮부터 장어구이를 즐기는 양복쟁이들이 즐비했다. 워낙 많은 인원이 근무하는 지역이라 경기의 파도를 크게 타지 않는 듯했고, 주머니 사정도 넉넉한 듯 오가는 이들은 편한 얼굴로 점심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식후 커피를 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흔한 광경이다. 그들 사이에서 법률사무소를 찾는 나이 든 이들도 보였는데, 한눈에도 식객들의 활기와는 구분돼 보였다.

법과 관련된 이들뿐 아니라 그들을 상대하는 업소도 골목의 주인들이다.

법과 관련된 이들뿐 아니라 그들을 상대하는 업소도 골목의 주인들이다.

주차 관리를 하던 건물 관리인은 “변호사가 많아 벌이 없는 이들도 많다는 뉴스도 나오는데 다 괜한 소리 같다. 여기는 사무실이 들어오면 나가지를 않는다. 그나마 망해나가는 변호사사무실은 없고 크게 확장하느라 나가는 경우는 봤다”고 했다. 세상의 분란은 더 커지고 그 아우성에 기대 사는 이들은 번창하는 시절이다. 로스쿨이 생겨 변호사들의 호시절이 끝났다는 엄살도, 철마다 인사철에 옷 벗는 판검사가 많아 서초동이 불황이라는 말도 믿지 못할 허언으로 들린다.

법원과 검찰청에서 멀어질수록 골목은 법의 색깔을 조금씩 벗었다. 교대사거리를 향해 남으로 나아가면 흔한 골목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낡은 연립주택이 있고, 치킨집과 동네마트가 보인다. 노인들이 많은지 마을 한복판에 노인복지센터와 쉼터도 보이고 공원엔 늦은 봄볕을 즐기는 노인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마트 주인은 “오래된 빌라들은 대부분 자가가 많다. 그냥 터 잡고 살아가는 주민이 많아 나잇대가 높은 편이다”고 말해주었다. 오래된 빌라들은 재건축 이야기도 나온다고 하는데, 노인들은 집값 오르기보다 터전을 옮기는 불편함을 더 못 견딘다고 했다. 그냥 살 때까지 살겠다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강남 한복판이고 세상이 온통 부동산에 혈안인 시절에도 귀찮음은 욕망을 이기는가 보다.

골목 안에는 뜸해졌지만, 법무사와 변호사사무실은 서울교대 인근 빌딩도 점령하고 있었다. 사이사이 송사를 위한 공증사무소도 여럿 있고, 녹취·속기사무소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뒷길은 흔한 대학가 골목답게 교재 복삿집이며 무슨 무슨 학사 간판을 붙인 변형 하숙집도 여럿 눈에 띈다. 식당도 서민적인 분위기가 나고, 법 관련 일색의 사무실을 간간이 건너뛰어 간판집이며 안경원에 부동산 사무실과 세탁소 그리고 피시방도 골목을 지키고 있다. 정육점 간판을 보니 이곳은 사람 사는 골목이란 생각이 든다. 큰길가엔 대부분 대형건물이 새로 들어선 반면 교대사거리 주변 골목길엔 오래된 건물과 집들이 버티고 있다.

서울교대 주변에 살아남은 오래된 골목을 제외하고 이 지역 대부분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입지와 주변 환경 모두 강남에서도 알짜로 손꼽히는 곳이라 비교적 비싼 아파트와 빌라촌이 터를 잡고 있다. 법원 길 건너 고속버스터미널로 넘어가는 비탈길에는 아주 오래전 참사를 빚었던 삼풍백화점 터가 있는데, 지금은 비극의 기억을 씻고 최고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그 아래쪽으로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들어선 골목이 있는데, 역시 대부분은 법률 관련 사무소가 밀집해 있다.

법조타운 일대는 해주 정씨 집성촌이 있던 곳이다.

법조타운 일대는 해주 정씨 집성촌이 있던 곳이다.

서초동 술집 발 소문은 대부분 소설

골목을 걷다 한가지 눈에 띄는 곳은 서초3동 파출소 앞의 유흥주점과 호텔들이다. 간혹 검찰청 주변의 소문이 흘러나오고 누가 어떤 발언을 했더라 하는 풍문은 이런 술집을 끼고 그럴듯하게 퍼져나간다. 정작 주점 관계자에게 물어보면 “이 바닥엔 입 잘못 놀리면 끝장난다. 어떤 손님이 오고, 그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귀신도 모른다. 귀는 닫고 입엔 자물쇠를 달아야 장사를 할 수 있다”고 전한다. 그러니 서초동 술집 발 소문들은 대부분 소설이라는 것이 룸살롱 30년 경력자의 전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검찰청과 법원 주변을 오갈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사 알 수 없는 일이라 뜻하지 않는 송사에 휘말릴 때도 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초동 법률사무소를 드나들어야 할 경우도 생긴다. 누군가에겐 명예와 재산과 일생이 걸린 일을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곳이 서초동 골목 안이다. 세상에 분란과 아픔이 많을수록 더 크게 돈을 버는 이도 있다. 이해가 충돌하는 곳에서 벌어지는 역설이다. 서초동 법조타운 골목길은 코로나19 팬데믹과 무관한 듯 번창하는 모습이다.

법과 권력에 기대하는 것은 정의로움이다. 정의가 무엇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만인 앞에 동일한 규칙이 적용되는 일이 정의의 참모습이다. 가난한 이나 부자나 권력을 가진 자나 지배받는 이나 모두 같은 원칙으로 구제받고 처벌받을 때 누구도 정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지난 시절, 그리고 최근 역사는 정의의 여신이 눈먼 꼴을 기록하고 있다. 서초동 법조타운의 번영이 세상 눈물의 대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 골목에 비친 햇살이 비탈진 법원길을 따라 지치고 두려운 걸음으로 올라가는 이들의 마음에도 비쳐 세상이 좀더 정의롭기를 바란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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